영화 ‘완벽한 타인’(유해진 이서진 염정아 김지수 출연, 2018 개봉)은 핸드폰의 비밀을 잠시 공유할 때 발생하는 개인생활의 파괴를 연출한 아름다운 감동의 영화다. 영화 말미에 자막이 올라간다. “우리는 모두 3개의 삶을 살아간다. 공적인 하나, 개인적인 하나, 비밀의 하나”라고. 모두가 공유해도 되는 드러난 사회적 삶, 사회적 삶속에서 개인으로 인정받는 독립된 삶, 그리고 자신만이 알고있는 비밀의 내적인 삶이다. 비밀의 삶이 핸드폰에서 드러나면, 개인의 삶과 외부의 삶이 파괴된다. 완벽한 타인은 그것을 말한다.
타인은 곧 타자(他者)이며, 이방인을 말한다. 他와 異는 의미가 같다. 他는 人과 也의 합성이다. 也는 물주전자를 본뜬 글자로서, 他는 주전자를 들고 있는 노예를 뜻한다. 신분이 천하다는 뜻이 他에 내재한다. 異는 탈을 쓴 무당을 상형화한 글자로서, 종교적 제사장을 의미하면서도, ‘사람이 아닌 신분’을 의미한다. 타인은 다름을 전제한다.
우리가 관계(關係)를 맺는다면, 그러한 인간관계가 성립하려면 반드시 남을 인정해야한다. 관계는 곧 선분이다. 나와 남, 나와 너, 나와 사회, 나와 하나님 등등 모든 관계는 상대를 인정할 때 선분으로 성립한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면, 관계는 없다. 자신만 있으면 그것은 관계의 선분이 아니고, 점(點 )에 불과하다. 상대를 인정한다는 것은 ‘다름의 존재’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인격적 존재로서 인정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인격으로 태어나심으로 사람과 함께 살면서 고통과 슬픔과 아픔과 기쁨과 행복을 느끼셨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 사람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다.
비밀을 서로 공유하는 것은 무의미함을 알게 되었다. 가령, 내가 속으로 뱉는 말을 누군가 안다면, 참으로 쓸쓸한 일이다. 말하지 못할 속사정은 은밀한 중에 들으시는 하나님께만 고해야한다. 그 어떤 비밀도 그러하다. 비밀을 안다는 것이 진실이 아니다. 진실(眞實)은 곧 실체적 진리(眞理)를 말하고, 진정한 사실(事實)을 뜻한다. 진정한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없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그는 완벽한 타자(他者)로서 ‘죽는 그리스도’로 내정되었다. 이 땅에 태어나면서 ‘죽는 그리스도’로 오셨다. 이것을 이상케 생각하면 안된다. 영광과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린다면, 그것은 달콤한 향락이겠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일시적 권력을 당신의 아들에게 허락하지 않고, 영원한 권력을 허락하시려고 일찌감치 유대교와 로마법을 통해서 버림받게 하사, 하늘의 왕이 되게 하셨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죽음이 내정된다. ‘죽는 그리스도’는 당연한 것이다. 가장 영예로운 죽음은 하나님을 위한 뜻의 죽임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의 왕과는 완벽히 다른 왕으로서, 죽은 자와 산 자와 미래인까지 포함하는 모든 인류의 왕이 되신 것이다. 살았으므로, 죽었으므로, 다시 살았으므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인류에게 왕이 되신 것이다.
완벽한 타인에서 부부끼리도 비밀을 공유하자, 부부관계가 깨졌다. 서로의 인식이 모두 동상이몽(同床異夢)이었다. 40년 친구중에는 그날 동성애자가 있음이 들통났다. 동성애자를 알게 된 친구들은 완벽한 타인으로 그 친구를 격리했다. 동성애자가 아닌 친구를 동성애자로 오해하는 해프닝이 있었으나, 오해를 받은 그 친구는 일시적 동성애자 취급을 받으면서 사회적 매장을 당한 것이다. 이처럼 비밀이 드러나면 관계는 단절된다. 그래서, 주님은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라고 한 것이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창녀에게 율법에 입각해 단죄를 내리려고, 정의를 실현하려고, 돌을 들고서 민중이 모였다. 그때 예수님은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다. 창녀를 살림이요, 창녀와 같은 로마를 살림이요, 이방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한 순간이다. 돌을 든 민중은 곧 바리새인의 혁명투사들이다. 그들은 무기를 들고서 로마군대와 대항해서 싸우려고 했다. 마치 북한의 김일성 가문이 핵무기를 들고서 주한미군과 싸우듯이 그러했다. 돌을 들고 창녀를 내리치려는 유대민중과 촛불을 들고서 정부를 탄핵한 시민혁명과 무엇이 다르랴!! 우리는 모두 겸허해져야한다.
세월호 사건, 미투운동, 박근혜 정권 탄핵, 대법원장 구속, 김경수 도지사 구속, 두루킹 댓글 조작 사건 등등 결국 ‘행한대로 받는다’는 인과응보가 철저히 실현되는 법치주의에 살고 있는 우리는 상대의 잘못을 들통내면서 자신의 의로움을 삼는 것을 버려야한다. 상대의 잘못은 자신의 정의가 될 수 없다. 결국, 그 칼이 자신을 향하기 때문이다. 노예가 생긴 이유는 전쟁 때문이다. 전쟁에서 이기면 패배한 부족은 모두 노예가 된다. 올해는 이겼고, 내년에는 진다. 그래서 전쟁에 참여한 A부족과 B부족은 모두 노예가 되어서 함께 살게된다. 그들은 노예가 되어서도 서로 전쟁한다. 이 비참한 악순환을 무엇으로 끊으리요. 진보와 보수, 친일과 종북, 친문과 친박, 노론과 소론, 남인과 북인,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자본가와 노동가 등등 ‘완벽한 타인의 존재’를 서로 인정하지 않음으로 모두 망하는 결론에 봉착한다.
예수님은 로마와 무장투쟁을 할 경우 결국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을 예언하셨다. 반면, 로마의 죄를 용서하고,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도록 용서와 화해의 복음을 전파하고, 유대교로부터 회개운동이 일어난다면 로마와 이스라엘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로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시대도 동일하다. 보수는 진보를, 진보는 보수를, 남한은 북한을, 북한은 남한을, 기독교는 타종교를, 타종교는 기독교를, 배타적 인식관으로 적대시한다면, 적과의 동침으로 결국 멸망당할 것이다. 완벽한 타인은 서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평화로운 공존을 유지하라는 깊은 묵시가 들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