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魔鬼)는 ‘악마와 귀신’이다. 악마(惡魔)에서 악(惡)은 굽은 마음(心)이다. 악은 항상 마음이 굽어지고, 틀어지고, 기울어지면서 발생한다. 창세기에서 뱀은 하나님의 말씀을 살짝 굽히고 변형시키면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다. ‘작은 변질’이 곧 이단이다. 그래서 믿는 자는 성경말씀을 명확히 알기 위해서 기도하고, 성령충만을 간구해야한다. 마리아는 성령충만함속에서 남자없이도 남자를 잉태했는데, 그 무엇이 불가능하랴!!
2월 4일, 마태복음 4장을 읽었다. 마태복음 3장은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만남이 요단강 무대를 배경으로 펼쳐졌다. 마치 동방박사와 아기 예수의 만남처럼 그러했다. 동방박사가 아기예수를 경배하고서 다른 길로 피신했는데, 세례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주고서 붙잡히는 ‘돌발변수’가 발생한다. 민주당이 김경수 도지사의 붙잡힘에 대해 함구하듯, 주님도, 마태도, 제자들도 이 사건에 대해 논평을 피한다. 나중에 죽게 된 배경과 세례요한의 질문이 거론될 뿐, 명확한 논평은 없다.
30년전에 헤롯왕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었고, 성령에 이끌려서 그 범인을 잡으러 주님은 광야로 가셨다. 마귀는 예수님을 3가지 시험으로 테스트했는데, 그 시험이 ‘마귀를 마귀로’ 입증하는 것이다. 주님이 시험을 받았다고 되어있지만, 주님이 마귀를 시험해서 탈락시킨 사건이기도 하다. 주님이 이기심으로 마귀는 영원히 패배했다. 이기신 주님의 은혜로 우리도 이긴 것이다. 주님은 사람의 대표로서 마귀를 이겼기 때문이다.
마귀는 시험문제마다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의 단서조항을 달았다. 마태복음 3장에서 세례를 받고서 하늘에서 들린 그 음성,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족’(蛇足)을 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을 붙여서 시험문제를 냈다. 마귀의 조건에 따를 이유가 전혀 없다. 돌을 떡으로 만든다고 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이미 이뤄졌고, 주님은 본래 태초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창세기때도 뱀은 하와를 선악과로 유혹했다.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탐욕의 틈을 비집고서 하와를 유혹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는 이미 하나님이다. 아담과 하와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안에 거했으니, 하나님처럼 살고 있었는데 하와가 너무 몰랐던 것이다. 하와에게 있는 것을 뺏기 위해서 하와를 속인 것이다. 하와가 뱀의 보이스 피싱에 걸렸다. 아담도 ‘하와의 탈을 쓴 뱀의 말’에 보이스 피싱을 당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도 ‘하나님의 자녀라면’이 자주 질문으로 등장한다. 그런 질문은 성령의 은혜를 시험하는 것이다. 배고픔도 헐벗음도 초라함도 무능함도 ‘하나님의 자녀됨’에 아무 조건이 안된다. 배부름과 화려함과 유능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 메달린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주님은 의식주(衣食住)를 초월해서 사셨다.
40일 금식에도 배고픔보다 말씀을 택했다. 食을 이기셨다.
성전꼭대기에서 내려가지 않으셨다. 교회의 집이 있었으나 주님은 지붕에 거하셨다. 住를 이기셨다.
마귀가 부귀영화를 제안하자, 단호하게 거절했다. 주님은 명예로운 옷을 받지 않았다. 衣를 이기셨다.
의식주(衣食住)를 이기신 주님이 우리에게 의로운 옷이 되시고, 진리의 양식이 되시고, 안식의 집이 되셨다.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지붕이시며, 부드러운 옷이며, 사랑의 안식처이시다. 그러므로, 믿는 자마다 의식주(衣食住)를 초월하는 삶을 사는데 도전해야한다. 배고픔도 헐벗음도 무능함도 주님을 닮아가는 성장통이다.
광야에서 40일 시험을 이기신 주님은 ‘요한의 구속영장’ 소식을 듣고서 갈릴리로 가셨다가 가버나움으로 주소를 옮기셨다. 가버나움은 베드로와 안드레와 요한과 야고보가 사는 동네다. 만약, 세례요한이 붙잡히지 않으셨다면 유대 광야 요단강 근처로 주소지를 옮기셨을 수도 있다. 연고자가 있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30년동안 살던 고향땅 나사렛을 떠나서 갈릴리 호수와 요단강이 있었는데, 마태는 기록하길 가버나움으로 주소지를 옮겼다고 했다. 요한의 붙잡힘을 통해서 하나님의 걸음이 갈릴리 바다로 향했으니, 그 걸음이 인류문명 2천년을 바꿔놓았다. 이방인을 위한 복음은 이미 이때부터 결정되었을 것이다. 또는 태어나시면서 헤롯왕의 학살로 이집트로 피신하시면서 결정되었을 것이다.
진보와 보수는 표밭이 다르다. 책마다 독자층이 다르다. 불교책은 불교신자를 대상으로 하고, 기독교 서적은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한다. 그처럼 말씀의 선포도 듣는 대상이 분명히 존재한다. 공허한 메아리로 외치지 않는다. 마태는 유대인을 향해 복음서를 썼고, 세례요한은 유대인 중에서 엘리트 계층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반면, 주님은 백성을 전도대상으로 삼으셨다. 엘리야가 아합과 종교 지도부를 상대로 싸웠듯이 세례요한이 그러했다. 반면 엘리사는 백성을 계몽했다. 아!! 평범한 백성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시는 주님이다. 엘리트보다 평범함을 택하신 주님의 걸음이 오늘은 아름답게 다가온다.
광야의 시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이끌림’이다. 성령에 이끌리면, 마귀에게 시험당해도, 마귀를 시험해도, 우리가 능히 이긴다. 성령이 마귀와 싸우기 때문이다. 우리안에 성령이 계시고, 우리가 성령안에 머물면 그 어떤 환란과 시험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성령은 언제나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신다. 성령은 절대로 ‘나를 섬기라’고 하지 않으신다. 성령은 하나님을 남편으로 삼으시니,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성령의 이끌림으로 하나님을 섬기셨다. 그래서 마귀가 떠나고, 천사가 수종을 들었다. 우리가 천사의 수종을 받는 것도 결국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음이다. 우리의 공덕으로는 마귀의 노예가 될 뿐이다. 주님의 은혜로 천사의 서비스를 받으면서 살아가니, 풍성한 감사로 하루를 살 일이다.
배가 고프니까 말씀이 더 맛있다.
집이 없으니까 주님이 더 편하다.
알몸으로 벗겨지니까 주님이 더 믿어진다.
주님은 주님으로 믿고 사랑하며 사는 진실한 신앙인이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