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염광(八福鹽光)은 “팔복은 소금과 빛이다”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표현한 사자성어다. 팔복장은 마태복음 5장에 나온다. 八은 사람의 두 팔을 말하고, 팔을 벌리면 4+4=8이 된다. 5+5=10(十)이다. 팔을 벌릴 때는 엄지를 붙이므로 ‘4’로 표시한다. 또한 八은 一을 쪼개서 나누는 모습이다. 나누면, 하나는 자기 것, 다른 하나는 상대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나눠서 제자들에게 모두 주셨고, 겉옷은 로마병정에게 주셨다. 피와 살까지 인류의 식량으로 나눠주시고, 12시간 무덤에 계신 후에 바로 부활하셨다. 이런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마태복음 5장에 팔복의 첫 번째를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 =>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나는 옛날에 이 구절을 읽으면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천국을 받는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아니고,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되어있어서 번역의 실수로 생각했다. ‘그들’도 ‘이들’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히브리어를 알지 못하니, 국어의 번역을 통해 뜻을 깊게 탐색한 결과다.
언젠가 목사님이 설교에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가난해져서, 우리가 천국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애통함으로 우리가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팔복장에서 앞에 나오는 분은 주님이시고, 뒤에 혜택을 받는 그들은 우리를 말합니다”라고 풀이하는데, “쿵”했다. 그때 감동은 잊혀지지 않는다. 오늘도 그 감동으로 팔복장을 읽는데, 아!! 주님이 그러하심으로, 우리가 은혜를 받았음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마태복음 5장 16절에서도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다. ‘그들’이 여기에 다시 나온다. 결국, ‘애통한 자와 위로받는 자’는 다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애통한 자는 어디서 위로를 받을까? 애통한 자는 ‘눈물의 위로’가 됨으로 그들에게 위로를 주는 것이다. 그들이 위로를 받음으로 또한 눈물은 위로를 받는다. 심령이 가난한 자와 천국의 소유자는 다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예수님이고, 천국의 소유자는 그들이며, 주님을 믿는 자들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가? 주님은 심령이 가난해지셔서, 천국이 되셨다. 천국이 되신 주님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마태복음 5장 11절에서는 비로소 ‘나’와 ‘너희’가 등장한다. 팔복장은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고 믿지 않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지는 천국의 비밀이고, 5장 11절은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혜택이다. 주님을 위해서 핍박을 받는 제자들에게는 하늘에서 “상이 크다”고 했다. 세상적 성공은 자기가 잘해서, 남의 것을 뺏어서 계단위를 올라간다. 주님은 자신의 것을 주면서 상대를 부유하게 하신다. 시소처럼 낮아지시면서 상대를 높이신다. 주님은 십자가에 메달리시면서 세상을 자유케 하신다. 주님은 구원받지 못하시면서 세상을 구원하신다. 이것이 곧 소금과 빛이다. 소금은 자신의 짠 맛을 음식에 모두 베풀고 존재는 사라진다. 음식속에서 짠 맛으로 변화한 것이다. 빛은 만물과 사람속에 들어가면서 자신의 존재는 사라진다. 빛은 빛의 형상이 없다. 빛이 빛의 형상을 갖는 순간 만물과 사람은 형체가 사라진다. 빛이 있어서 만물과 사람은 ‘보여짐의 형상’을 갖게 된다. 빛은 곧 ‘연결과 화목의 매개자’이다.
팔복장을 이상케 생각하면 안된다. 부모가 부유하지만, 스스로 가난하게 사심으로 유산을 자녀들에게 상속한 것과 같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지 않음으로 성전건축 헌금의 황금이 솔로몬에게 상속된 것과 같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했다면 솔로몬은 건축하지 못한다. 팔복장은 주님이 버려짐으로 ‘희생의 의로움과 버려짐의 은혜’가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부모가 모은 재산을 스스로 사용한다고 해서 자식이 힐문할 수는 없다. 세상의 권력자는 자신의 것을 자신이 누린다. 반면, 우리 주님은 자신이 누릴 권세와 부귀영화와 의로움을 제자들과 인류에게 나눠주시면서 당신은 버려짐의 십자가 길을 걸어가셨다. 이것이 천국의 비밀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러한 ‘천국의 열쇠’를 상속받으라고 했다.
세리는 자신의 수고로 재물을 축척하고, 권력가는 자신의 힘으로 힘을 얻어서 궁궐을 짓고, 바리새인은 금식과 십일조와 열심을 다해서 의를 쌓아서 자신의 복을 기도한다. 세리와 권력자와 바리새인은 모두 ‘자신들의 의로움을 자신이 누리는 것’에 해당된다. 반면, 주님은 당신의 의로움을 세상에 베푸셨다. 겉옷과 속옷을 주신 것은 당신이 누릴 영화와 권세와 의로움을 주신 것이다. 자신의 것을 남에게 주는 것, 이것이 천국의 깊은 비밀이다. 천국은 ‘의로움의 크기’로는 결단코 들어갈 수 없다. 천국은 자신이 쌓은 의로움을 남에게 줄 때, 십자가의 전가(轉嫁)와 같은 ‘소금과 빛’의 ‘나눔과 베품’을 실천할 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자신이 누릴 재물을 주변에 베풀 수 있는가? 자신이 얻은 권력을 이웃들과 함께 누릴 수 있는가? 자신이 얻은 의로움과 영화를 주변에 나눠줄 수 있는가? 주님은 팔복장에서 그것을 말씀하신다. 그것을 할 때 놀랍게도 천국이 시작되며, 그 천국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