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祈福)은 복을 받는 것이다. 기복(棄福)은 복을 주는 것이다. 누구나 기복(祈福)을 바란다. 주님은 믿는 자들에게 말한다. 복을 받고싶거든, “그 복을 주라”고 하신다. 납득하기 어려운 요청이 마태복음 5장에 들어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는 말은 듣기 좋은 말이 아니다. 소금은 뿌리짐으로, 버려짐으로, 사라짐으로 그 존재가 정의된다. 소금이 세상에 뿌려짐으로 세상의 음식이 만들어진다. 이것이 주님의 방식이다. 태양의 햇살로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농사를 짓는다. ‘빛’은 곧 제자들의 착한 행실과 의로움이 세상에 전달되게 하라는 것이다. 세상은 불의하지만, 믿는 자들이 의롭다면 그 의로움이 ‘세상의 불의’를 의롭게 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3년의 헌신을 놓고서 예수님께 댓가를 요청한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권력암투가 벌어진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국정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가령, 예수님은 바라바가 있던 감옥에 가셔서, 바라바에게 자유를 주셨다. 그리고, 주님은 바라바의 십자가에 메달려 죽으셨다. 주님의 자유는 바라바에게 주어지고, 주님은 바라바의 형벌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방식이다. 납득할 수 있는가? 당시 무력투쟁으로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고 했던 시카리당을 위한 주님의 십자가였다.
주님은 도망치면 도망칠 수도 있었다. 충분히 그렇게 하실 수 있었다.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사전에 살해음모의 정보를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망치지 않으시고 체포됐다. 주님이 체포됨으로 도망친 베드로가 돌아왔다. 이것이 주님의 방식이다. 납득할 수 있는가?
예수님을 후아담이라고 하는 것은 아담의 죄를 담당해서 그렇다. 아담의 자리에서 그 죄값을 담당해서 후아담이라고 한 것이다. 첫째 아담, 둘째 아담, 셋째 아담을 누군가 말한다면, 그것은 둘째 아담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담당해야만 한다. 그것을 담당한 제자들은 맏아들인 예수님과 함께 양아들이 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곧, 제3아담, 제4아담, 제5아담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를 짊어져야만 아담이 될 수 있다. 후아담인 예수님이 아담의 죄를 짊어짐으로 후아담이 되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같이 짊어져야만 후아담과 연결된다. 십자가를 부정하면, 아담이 될 자격이 상실된다. ‘아담’은 곧 ‘하나님이 보시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다운 사람’이 바로 ‘후아담인 예수님’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다운 사람’이므로, 역시 후아담이 되는 것이다. 후아담의 다른 말은 ‘새 사람’이다.
사람은 두 종류다. 하나님의 사람들과 세상의 사람들, 둘로 구분된다. 성별로는 남자와 여자요, 믿음의 성별로는 하나님의 사람들과 세상의 사람들이다. 십자가의 의미를 믿고 소금과 빛의 희생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고, 권력과 피라미드의 방식으로 자신의 복을 추구하는 자들은 세상의 사람들이다.
기복신앙(祈福信仰)은 세상의 사람들이다.
반면, 기복신앙(棄福信仰)은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棄 = 버릴 기)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복을 베풀고 나눠준다. 축복을 구하되, 원수를 축복하고, 죄인의 죄를 대신 회개하면서 세상속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갈 때, 이 세상은 썩지 않고 서서히 이상세계 천국이 되어간다. 이것이 마태복음 5장에 숨겨진 천국의 깊은 비밀이다. 납득하기 어렵지만,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