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장 6절에는 갑자기 ‘개와 돼지’ 비유가 나온다. 마태의 실수일까? 도무지 맥락이 맞지 않다. 앞뒤 순서가 연결되어야 독자들의 공감대가 늘어날텐데, 무슨 맥락으로 말했는지 감(感)을 잡을 수가 없다. 감(感)이 오지 않을 때는 앞뒤 문맥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언젠가 목사님을 통해 터득한 성경해석 방법중 하나다.
개와 돼지 비유는 ‘말씀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뜻으로 자주 활용된다. 옛날에는 그렇게 이해했다. 지금은 다르다. ‘말씀’이 무엇인가? 오직 성경말씀이 ‘말씀의 근본’이며, 구약과 신약성경을 제외한 모든 성경해석은 ‘해석의 범주’에 속할 뿐이다. 그렇다면, ‘거룩한 것과 너희 진주’는 새롭게 이해될 필요가 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마태복음 7:5~6)
개와 돼지는 ‘외식하는 자’에 해당한다. 그런데, 외식하는 자가 자신의 들보를 빼냈다고 하자. 그러면 외식하는 자가 더 이상 아니다. 외식의 안경을 벗었으니, 진리의 눈으로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다. ‘들보’는 곧 ‘율법의 안경’을 말한다. 각자의 내면적 모순을 없애고 다시 보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인다. 새롭게 보게 되는 ‘형제의 티끌’이 ‘거룩한 것’이며, ‘너희의 진주’다. 자신의 들보를 빼지 않고서 보여지는 형제의 티끌은 ‘자신의 들보’에 해당되고, 자신의 들보를 빼낸 다음에 보이는 형제의 티끌은 ‘빼내라’고 했다. 그때, 형제에게 형제의 티끌을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형제를 권면하는 인격적 충고인데, 형제는 ‘개소리’로 알고서 ‘개처럼’ 컹컹 짓는다. 돼지처럼 충고를 짓밟는다. 그것은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끌’이 곧 그 형제에게 들보여서 그렇다. 형제가 ‘들보의 안경’으로 충고를 오해한 것이다. 그럴 경우, 개와 돼지에게 ‘진실한 충고’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면 진실한 충고가 비판의 몽둥이로 비쳐질 수 있어서다. 어쩌겠는가!! 결국, 각자 자신의 들보를 빼는데 전심을 다하고, 형제의 티끌을 빼는 것은 주의해서 하라는 ‘인간관계의 깊은 묵시’가 들어있다.
‘개와 돼지’ 비유말씀으로 이분법의 모순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 주님은 유대교앞에 영원한 이방인으로 사셨다. 버림받은 구원주였다. 그것을 명심해야한다. 만약 ‘개와 돼지’ 비유로 누군가를 ‘개와 돼지’처럼 판단했다면, 그속에 주님이 계시면 어쩌랴!! 개와 돼지로 버려진 무리속에 주님이 계시면 어쩌랴!! 주님은 귀신의 왕으로 불렸고, 창녀와 세리의 친구로 낙인찍혔고, 하나님을 망령되게 일컫는 참람한 자로 정죄당했다. 거룩한 율법을 파괴한 자로 오명을 썼다.
유대인은 주님을 ‘개와 돼지’로 취급했다. 그러므로, 정죄의 안경을 스스로 쓰지 않도록 매사에 주의해야한다. ‘개와 돼지의 비유’는 형제를 개와 돼지로 정죄하라는 것이 아니다. 거룩한 것을 받아드리지 않을 경우에는 ‘진실한 충고’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살다보면, 개와 돼지도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놀라운 성령의 은혜로 그렇게 될 수도 있으니, 인내롭게 기다리고 기도해야한다. 믿는 자중에 본래 개와 돼지처럼 살지 않은 자가 어디에 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