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칼럼’이 누군가에게 거짓 선지자의 외침으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깊게 이해하길 바란다. 마태복음 7장 15절에 거짓 선지자의 분별법이 나온다. 거짓 선지자는 ‘양의 옷’을 입고 있고,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다. 그들은 열매로 분별할 수 있다. 그리고, 마태복음 7장 23절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이다. 이들은 나쁜 열매를 맺는 엉겅퀴요, 가시나무다. 그런데 이들의 말을 유심히 살펴봐야한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항변한다.
이들이 도대체 누구인가? 바로 제자들이다. 우리는 이것을 망각하면 안된다. 거짓 선지자들이 있다면, 거짓 제자들도 있고, 거짓 사도들도 있다. 12사도는 모두 거짓 사도들이다. 회개하기 전까지, 모두 거짓 제자들이었다. 회개한 이후에 베드로와 요한과 안드레와 야고보는 진정한 사도들이 된 것이다. 가룟유다는 회개하지 못해서 거짓 제자로 영원히 남겨졌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은 거짓 제자들은 새로운 제자가 되었고,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한 가룟유다는 거짓 제자가 된 것이다.
거짓 교사는 누구인가? 바로 사울이다. 사울은 율법학자로서 그 시대 대석학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박사논문을 받을 정도로 인정받은 인물이며, 산헤드린의 현직 국회의원이며, 기독교인 체포권을 발부받은 현직 검사였다. 그러나, 사울은 인식관에 들보가 있어서, 율법의 안경으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했다. 다메섹에서 사울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눈이 멀었다. 자신이 봉사가 되어서 눈에 있는 비늘이 나중에 제거되었다고 고백한다. 그 비늘이 바로 ‘눈의 들보’였다. 사울은 거짓 교사였으나, 눈의 들보를 뺀 후에는 진실한 교사가 되었다. 회개의 열매를 맺은 사울은 말씀의 교사가 된 것이다.
‘양의 옷’을 입고,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있다. 이 구절을 이해할 때 보통 ‘양의 탈’을 쓴 늑대로 착각한다. 양의 탈을 썼으면 그 누가 거짓 선지자를 못 알아보겠는가? 예수님께서 취임연설문 말미에 힘을 주면서 강조한 이유를 알아야한다. 모든 연설을 마치면서, 거대한 울림으로 ‘마침표’를 장식하신다. 거짓 선지자=불법을 행한 자=모래위에 집을 지은 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지자였고, 귀신을 몰아내고, 권능을 행한 자들이다. 쉽게 구분할 수가 없다.
‘양의 옷’은 곧 사명이다. 사명은 하늘이 부여한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AD70년에 침공했다. 티토 장군이 짓밟았다. 그리고 그는 로마황제가 되었다. 심판의 권능은 하나님이 부여한 사명이다. 티토 장군은 하나님의 사명을 준행했다. 그는 구원받았을까? 예수님은 가룟유다에게 떡을 주셨다. 그때 가룟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고 성경은 묘사한다. 그는 성경의 예언대로 예수님을 판 사명을 이뤘다. 그렇다면, 가룟유다가 구원을 받았는가?
교황 레오 10세는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한 거룩한 사역을 위해 면죄부를 파는 사명을 준행했다. 그는 구원을 받았는가? 칼빈은 절대예정론을 실천하면서, 엄청난 살인을 저질렀다. 그는 구원을 받았는가? 엘리야는 850명의 우상숭배자를 살해했다. 그는 구원을 받았는가?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해야한다. 그들의 행위가 우리와 멀지 않으니, 깊게 논해야한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사명은 사명이고, 구원은 구원이라고!!!
구원주의 사명자가 참으로 많다. T종교, J종교가 탁월한 성경 수리학을 활용해서 사명기간을 선포했다. 모든 것이 수레바퀴처럼 완벽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사명자인가? 아멘!! 나는 믿겠다. 그렇다면, 그들은 세상을 구원할지라!! 구원주이신 예수님은 ‘구원의 배제’를 통해서 그 시대를 구원했다. 구원주의 이름으로 오는 모든 자들이여, 시대를 구원하기 위해 그 값을 지불할지라!! 그런데, 구원주로 오는 모든 자들은 자신만을 구원하지, 성도와 시대는 버렸다. 그들은 그래서 구원주가 아닌 것이다. 구원주는 시대와 성도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이 버려진다.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한 구원주’임을 알아야한다. 예수님은 누가 구원을 시킬까? 바로 하나님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완벽히 버려짐으로 시대의 죄값을 위한 대속물이 되시니, 하나님께서 버림받은 예수님을 구원하신 것이다. 구원주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으니, 그 누가 이 비밀을 알려나…. 알면 ‘구원주의 마패’를 내밀지 않았으리라.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우측과 좌측에 앉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청탁을 한 것이다.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작은 엄마다. 예수님은 물었다. “내가 마실 잔을 마실 수 있느냐?”라고, 그랬더니 그들이 “마실 수 있나이다”라고 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렇다면 마시라, 그러나 영의정과 좌의정은 하나님께서 정하실 것이다”라고 하신다. 그 잔이 곧 ‘구원을 위한 죽음의 잔’이다. 구원주의 사명을 원한 자들마다 ‘그 잔’의 의미를 알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으리라. 구원주의 사명을 내세운 자들마다 그 행위가 열매를 증명한다. 권력을 추구하는 자들은 ‘권력형 구원주’이고, 돈을 추구하는 자들은 ‘경제형 메시야’이다. 건물을 추구하는 자들은 ‘재물형 구원주’이다. 영혼의 구원주가 되려면, 세상을 버려야한다. 그래서 영혼을 구원하실 구원주는 오직 예수님 외에는 없다.
‘양의 옷을 입은 이리’를 반드시 알아야한다. 그들은 뿔달린 마귀가 아니다. 예수님께 ‘양의 옷을 입은 이리’는 누구였을까? 바로 베드로였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다. 그 아름다운 고백이 양의 옷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십자가는 안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다. 노략하는 이리가 베드로속에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양의 옷을 입은 이리 제자’였다. 회개를 통해 훗날 거듭나면서, 십자가에 메달려 죽기까지 베드로는 고통의 삶을 살았으리라.
창세기에서 누가 양의 옷을 입은 이리였는가? 하와다. 하와는 아담의 아내였는데, 속에는 뱀이 있었다. 뱀의 말을 가슴에 품고, 겉은 아내인 척 있었다. 하와는 아내의 사명이니, 그것이 양의 옷이다. 양의 옷은 하나님께서 허락했다. 양의 옷을 입은 하와가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었다. 그것이 타락이다. 양의 옷을 입어도, 그 행실이 이리처럼 한다면 구원은 없다. 선악과(善惡果)는 겉은 선(善)이요, 속은 악(惡)이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이다. 양의 옷을 입은 노략하는 이리가 곧 선악과 같은 거짓 선지자들이다. 조심해야한다. 그들은 어디에 있을까? 나에게, 나의 가족에, 나의 교회에, 나의 민족에, 나의 세계에 있다. 아담에게 아담 자신이 양의 옷을 입은 노략하는 이리였고, 하와가 양의 옷을 입은 노략하는 이리였다.
언젠가, 내가 30년 있던 교회에서 교단의 중직자가 나를 찾았다. 내가 쓴 모든 칼럼을 내리라고 요구했다. 내가 “왜요?”라고 물었다. 그가 말하길 “너무 감동적이라서 선생의 말씀을 가립니다”라고 했다. 나는 웃을 뻔 했다. 너무 감동적이라서 모든 칼럼을 내리라는 그 역설앞에 나는 “내릴께요”라고 순복했다. 싸울 이유가 없었다. 그 중직자는 양의 옷을 입은 노략질하는 이리다. 왜냐면, 사명을 받고서 왔으니 ‘양의 옷’을 입었고, 감동의 칼럼을 없애라고 요구했으니, 이리다. 그 행실로서 그 실체를 아는 것이다. 사명은 껍질이다. 하나님께서 부여했을지라도, 사명은 껍질이다. 그 행실이 그 실체를 말한다. 결코 속으면 안된다.
누가 적그리스도인가? 그리스도에서 변질된 자이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다. 그리스도는 곧 사명자로 번역할 수 있다. 누가 거짓 사명자인가? 마귀는 변질된 천사이다. 마귀는 본래 천사였다. 그처럼 적그리스도는 본래 그리스도였다. 그리스도로 기름부음을 받았으나, 그리스도의 사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자마다 모두 적그리스도다. 사울이 대표주자다. 그는 그리스도로 기름부음을 받았으나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자신의 왕국을 세웠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울을 버린 것이다. 솔로몬은 어떠한가? 지혜의 기름부음을 받고 그리스도가 되었으나, 그는 화려한 성전을 건축하고 이방여인들과 향락의 잔치를 벌였다. 그가 죽자, 그 형벌이 후손에게 그대로 상속됐다. 솔로몬의 지혜는 그 시대 그 수준일 뿐이다.
‘양의 옷’은 곧 모든 사명을 뜻한다. 특히 ‘양’은 어린양 예수님을 상징한다. 요셉이 채색옷을 입었다. 그 채색옷은 야곱이 입었던 결혼예복이다. 야곱이 결혼예복을 요셉에게 물려준 것이다. 그처럼, 예수님이 ‘양의 옷’을 사명자에게 주셨다. 예수님이 주시지 않았으면, ‘이리의 옷’이라고 했을 것이다. 분명, ‘양의 옷’을 입은 늑대라고 했다. 사명자마다 예수님께, 하나님께 사명의 옷을 받는다. 그런데 사명을 받고 서서히 늑대가 되고, 이리가 된다. 사명의 옷을 주신 예수님은 그 사명을 통해서 ‘어린양’이 되길 원하는데, 사명을 받은 자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면서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다. 사명을 준 근본 이유는 사명을 통해서 자신의 구원을 이루고, 성도의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명을 수행한 자들에게’ ‘불법을 행한 자들아’라고 저주를 퍼부은 이유가 무엇일까?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자들”에 답이 들어있다. 사명은 하나님께서 주신다. 사명을 받은 자들이 그 사명을 가지고 자기 뜻대로 행하니까 ‘불법을 저지른 자들’이 된 것이다. 사명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한다. 성경 수리학으로 사명기간을 선포한 사명자들도 동일하다. 과연 그들의 주장이 맞다면, 사명기간이 끝나는 때에 하나님은 정산하실 것이다. 사명과 구원은 별개다. 그것을 그들은 반드시 알아야할 것이다. 사명이 끝나면, 사명자에 대한 평가와 심판이 내려진다. 세상 정권도 그렇고, 하늘의 사명자들도 동일하다. 예외는 없다.
‘열매로 나무를 알지라’는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한다. 여기서 열매는 ‘부귀영화와 권력과 성전’이 아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와 전쟁을 했을 때, 마귀의 열매는 ‘돈과 권력과 부귀영화’였다. 예수님은 그것을 단호히 거부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라’고 선포했다. 열매는 곧 ‘하나님을 섬기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말씀대로 사는 것’은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5장과 6장과 7장에 있는 언약의 말씀이다. 5장과 6장과 7장을 준행하는 사명자는 ‘반석위에 세운 집’의 사명자이고, 5장과 6장과 7장을 무시하는 사명자는 ‘무래위에 세운 집’의 사명자이다. ‘사명의 옷’은 중요하지 않다. 양의 옷이 실체를 규정하지 않고, 옷속에 있는 존재가 실체를 결정한다.
옷은 사람이 아니다. 그처럼 사명은 실체가 아니다. 누구든, 사명은 받을 수 있다. 그 사명대로 행하느냐가 중요하다. 사명을 받고서 사명대로 하지 못한 변절자는 무수하게 많다. 그런 자마다 모두 사울의 길을 간다. 그들을 일컬어 ‘거짓 선지자’라고 하고, 양의 옷을 입고 있는 노략하는 이리다. 내가 될 수 있고, 교회 목사가 될 수 있고, 아내와 남편이 될 수 있고, 친구가 될 수 있고, 가족이 될 수 있고,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있고, 종교 교주가 될 수도 있다. 그들의 화려한 권력과 영향력이 실체가 아니다. 실체는 ‘사명의 옷’을 벗긴 그들의 행실이다. 사명의 옷은 그저 아담과 하와가 잠시 가린 ‘무화과 잎’에 불과하다. 실체는 무화과 잎을 벗길 때 드러난다.
프란체스코 교황의 사명이 거짓일까? 아니다. 사명은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사명과 삶은 별개다. 이단의 교주들이 과연 거짓 사명을 받았을까? 나는 모르겠다. 그들의 사명이 어디서 왔는지, 그 누가 알겠는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기억해서 하갈의 자녀도 축복했다. 이슬람은 하나님께서 축복함으로 발생했다. 사명의 옷은 거짓이 없다. 거짓 선지자가 되는 것은 거짓행위를 해서 그렇다. 선지자 사명은 하나님께 부여받는다. 사명의 옷을 입고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성도를 겁박하고, 거짓을 일삼는다면, 그가 누구든 거짓 사명자인 것이다. 이것이 분별의 척도다. 만약, 내가 성경지식을 활용해서 불법을 추구한다면, 나도 거짓 교사인 것이다. 그 행위가 정체성을 결정한다. 옷이 실체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한다.
왜 이혼할까? 그것은 결혼한 아내와 남편이 역할을 제대로 못해서 그렇다. 왜 결혼할까? 그것은 결혼하면 역할을 제대로 할 것 같아서 그렇다.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는 바로 이것이다. 거짓 선지자는 이혼할 정도로 패역한 선지자이고, 진실한 선지자는 결혼한 이후에 그 역할을 제대로 행한 선지자이다. 거짓 선지자도 진실한 선지자도 모두 ‘하나님의 선지자’에 해당된다. 하갈도 사라도 모두 아브라함의 아내이듯 그렇다. 신분은 하나의 옷이요, 행위는 그 실체다. 그러므로, 모든 사명자는 자신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할지라!! 사명기간이 끝나면, 사명기간에 대한 모든 행위가 탄핵일지, 구원일지, 결정됨을 반드시 알아야한다. 사람마다 죽으면 심판이 있듯이, 사명자마다 사명기간이 끝나면 심판이 있다. 그 심판이 ‘사명의 구원과 실패’를 판단한다. 사명의 생명이 끝나면 심판, 이것이 하나님의 천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