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6.7장은 산상수훈이다. 다윗은 사무엘의 기름부음을 받고 골리앗을 이기고 사울의 사위가 됐다. 7년동안 도망자 신세가 된 후에 장인이 죽고서 왕에 등극했다. 반면, 예수님은 마태복음 3장에서 세례요한의 물세례를 받고서, 4장에서 골리앗같은 마귀를 물리친 다음에 곧바로 왕에 취임하셨다. 세상 왕들은 마귀의 허수아비요, 이장에 불과하므로, 마귀를 물리쳤으니 주님은 이 땅에 왕이시다. 아멘!! 산상수훈 567로 기억하면 좋다.
모세는 호렙산 준령 시내산에서 ‘민족의 노예해방 소명’을 약속받고,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민족을 이끌고 출애굽을 했다. 그리고 1년 정도 시내산 근처에서 머물며, 십계명을 받았다. 십계명을 받은 곳이 시내산이다. 마태는 제2의 모세로 예수님을 비유하면서,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모습을 마태복음 567장에서 묘사한다.
출애굽기를 보라. 그때 하나님은 구름을 타고 호렙산에 강림했다. 출애굽을 처음 명령받은 그때는 하나님께서 불꽃으로 강림해서 모세가 두려움으로 목격했다. 이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모세의 고향과 같은 시내산에 다시 왔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그곳에 머물렀다. 구름타고 강림하신 여호와를 민족 전체가 목격했다. 그런데, 여호와는 아무도 못 봤다. 모세조차 하나님의 ‘등판’만 봤고, 그 등판이 곧 돌판이 되어서 십계명을 받았다. 하나님의 등판을 본 모세는 백성가운데 나와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백성들은 죽임을 당할 수 있으니 ‘접근금지명령’으로 통제선을 설치했다. 마태는 마태복음 5장과 8장에서 ‘구름타고 오시는 주님’을 은밀하게 소개한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모세가 얼굴에 수건을 가리듯, 마태는 비유의 문학장치로 예수님의 존재를 살짝 감췄으니, 비유의 수건을 벗기는 자마다 구름타고 오시는 주님을 알게 된다. 주님을 믿는 자들은 이미 ‘구름속에서’ 주님을 만난 것이다. 시내산 전체가 이미 여호와의 영광과 구름으로 덮였다. 그때 모세만 산속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산속으로 함께 올라가서 제자들을 앞에 세우고서 새언약의 복음을 선포하셨으니, 예수님은 하나님의 얼굴로 나타나신 것이다. 율법의 돌판은 차가움이요, 살과 피를 입으신 예수님은 사랑의 심장이다.
‘구름타고 강림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제자들도 잘 몰랐다. 모세5경에 나타난 그런 하나님의 강림을 생각해서 그렇다. 과연 그런 하나님의 강림이 예수님께도 실제로 있었으니, 부활승천하신 구름 사건이다. 성경은 증언하길, 수많은 무리들이 보는 가운데 주님은 구름속으로 사라지셨다. 그렇다. 영광의 구름이 보이면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 제자들은 이 땅에서 주님을 보았으므로, 구름속에 있었던 것이다. 인구름, 군중구름을 ‘구름’으로 생각하지만, 그건 성경문법에서 너무 단순한 아메바식 해석이다. 마치 모세가 수건을 가린 것과 같은 성경해석이다. 수건을 벗기듯, ‘구름을 사람으로 특정하는’ 수건 비유법을 벗어야한다.
수건 비유법은 근본을 못보는 ‘봉사의 맹점’에 빠진다. 수건 때문에 모세는 백성을 못보고, 백성은 모세를 못 봤다. 수건을 벗고 시내산속으로 올라간 모세도 사실은 하나님을 못 봤다. 수건으로 가려지는 상경해석은 주님속에 강림하는 영광의 하나님을 못 본다. 구름은 따르는 무리가 아니고, 주님도 아니고, 주님속에 계시는 하나님이다. 이것이 근본이다. 왜 십자가를 영광의 십자가라고 하겠는가? 그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아름답고 신비롭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가려진 하나님의 진실이 십자가를 통해서 완벽히 드러나서 그런 것이다.
십자가를 ‘저주의 십자가’ ‘죽음의 십자가’로 판단하는 자마다 ‘수건에 가려진’ 모세의 율법에 속한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없애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베드로의 배신길을 가다가, 점점점 가룟유다의 멸망이 임하게 된다. 십자가를 폐하는 자마다 구원이 없다. 주님은 율법을 폐하지 않았다. 율법속에 구원이 있어서 그렇다. 율법을 완성하신 증표가 십자가이다. 그런데, 구원의 십자가를 폐하는 자가 있다면 구원이 없는 것이다.
십자가를 반대하는 자들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사역에 실패했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듯이 예수님은 천국에 못 들어가고, 신광야와 같은 낙원급 신약에 머물렀다”고 설명한다. 얼핏 들어보면, 그럴듯한 설명인데, 뱀의 말이다. 속으면 절대로 안된다.
성경은 증언한다. 모세는 백성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사건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그리고, 결국 모세는 가나안을 멀리 쳐다보면서 운명했다. 주님이 그러하셨는가? 주님의 가나안은 어디인가? ‘약속의 가나안’을 몰라서 ‘십자가의 정체성’이 헤깔린 것이다. 모세에게는 가나안의 땅이 상속지분이었다. 땅을 약속받았으나, 모세는 상속받지 못했다. 그 약속이 여호수아와 갈렙에게 위임되어서 이스라엘 백성 2세가 가나안에 들어갔다.
예수님이 약속받은 땅은 ‘천국’이며, ‘지상천국’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도의 마음가운데 임하는 지상천국으로 ‘생명성전’이다. 모세는 정탐꾼 12명을 가나안땅에 보냈다가 10명이 불신하면서 하나님의 형벌을 받았다. 모세는 왜 가나안 정탐을 직접 가지 않았을까? 여호수아도 직접 정탐하지 않고, 최측근 2명만 보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마태복음 4장에서 직접 ‘약속의 가나안’으로 쳐들어가서, 마귀와 전쟁을 선포해서, 단번에 승리하셨다. 정탐도 필요없었다. 모든 땅을 성령과 함께 뺏고, 백성가운데 돌아오신 것이다.
예수님께 누가 기생 라합이겠는가? 바로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요,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세례요한이요, 창녀 마리아요, 향유옥합을 부은 베다니 마리아요, 회심한 배신자 베드로다. 마귀를 이긴 주님은 3년동안 제자들도 지상천국의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힘껏 도우셨고, 골고다 십자가 길에서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 제자들에게 지상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였고, 지상천국의 역사가 펼쳐졌다. 모세는 그 백성과 함께 신광야에 머물렀다면,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영광의 지성천국’에 들어가신 것이다. 그 비밀이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육체가 죽으신 것’과 관련해 논한다면, 죽으심으로 살리심을 받았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로 정의된다. 아브라함의 가장 위대한 행위는 믿음으로 이삭을 바친 것이다. 과연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께 의로움이 되셨으니, 아브라함은 죽은 이삭을 믿음으로 돌려 받았다. 죽은 이삭의 몸이 살아나듯, 부활의 이삭을 받았다. 그 이삭은 ‘영혼의 이삭’이 아니다. 두려움에 떨던 그 늦둥이, 나무에 메달린 그 이삭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듯,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께 바쳤다. 어린양이 되심으로, 그렇게 하셨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돌려받고, 준비된 다른 양으로 번제를 드렸건만, 주님은 바라바를 살려보내고, 주님이 그 십자가에 희생양이 되셨다. 제자들이 만약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주님을 기다렸다면, 그 약속이 성취될지라. 오로지, 주님만이 십자가의 뜻길을 아셨다. 아브라함처럼!!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침으로 이삭을 돌려받았는데, 주님은 당신을 바침으로 어떻게 돌려받는가? 육체가 살아나지 않는다면, 돌려받을 육체가 없으시니 이 또한 낭패요, 돌려질 육체도 없다면 이 또한 낭패다. 육체가 실제로 살아나셔야 구약의 예언이 성취됨을 훗날 제자들이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육체가 실제로 살아났듯이, 하나님의 아들이 실제로 육체로 임하신 것도 제자들은 진실로 믿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육체부활, 예수님의 성령잉태는 결코 신화가 아니다. 실화다. 예수님의 육체부활이 ‘영체부활’이라고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였다고 하는 자와 같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죽였으나, 돌려받았다. 이삭과 함께 아브라함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처럼 예수님은 예수님의 육체로서 무덤을 걸어나오셨다. 그 육체는 붕대를 벗은 완벽한 새 육체다. 믿을 것은 본래 육체가 살아남으로 새로운 육체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이 새로운 물, 포도주로 변화하듯 죽은 육체가 실제로 영체로 변화한 것이다. 실제 육체로 죽으셨듯, 실제 육체로 살아나셨다. 이것이 약속의 증표요, 부활의 실체다.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장사케 하라
마태복음 5.6.7장의 취임연설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셨다. 마태복음 8장은 마치 율법의 돌판이 2개로 쪼개져 있듯이, 예수님의 사역이 둘로 나뉜다. 하나는 사시는 동네 가버나움에서, 다른 하나는 갈릴리 호수를 건너서 가다라 공동묘지에서다. 가다라 공동묘지는 ‘거라사인 공동묘지’로도 불린다. 서울의 망우리 공동묘지 같은 곳이다. 예수님은 본적이 하늘천국이다. 그곳을 떠나 주소지를 베들레헴, 이집트, 나사렛, 가버나움으로 4번 옮기셨다. 마태복음 8장에는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다’고 하셨으니, 가버나움의 주소지도 사실상 없어졌던 것 같다. 산에서 내려오시고, 나병환자와 백부장 하인의 중풍병, 베드로 장모의 열병(몸살감기)을 치료하셨다.
마태는 ‘아버지가 죽은 제자의 장례식’을 갑자기 등장시켰다. 무슨 편집 의도가 숨어있을까?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장사케 하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그 제자에게 비유적으로 한 말씀이라고 보통 설명한다. 제자에게는 “장례식에 가지 말고, 지금 나를 따르렴, 내가 네 아버지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줄게. 나와 함께 급히 갈 곳이 있다”라고 했을 것이다. 그 장례식 사건을 마태는 오묘한 비유로 그 시대와 지금 현대인에게 깊은 울림을 전한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케 하고 너희는 나를 따르라”
– 마태복음 8:22
‘죽은 자들’이 2번 나온다. 앞의 죽은 자들은 신앙이 죽은 자들이고, 뒤의 죽은 자들은 육체가 죽은 자들이다. 그들은 ‘신앙이 죽은 자들’이다. 제자의 아버지가 죽었는데, (육체가) ‘죽은 자들’로 표현되었다. 이것은 마태가 의도적으로 모든 인류에게 예수님의 궁극적 말씀을 전한 것이다. 그 제자의 아버지는 실제로 죽었으나, 주님을 믿는 자들은 아버지가 살아있는 자들도 있고, 각종 멘토의 아버지를 둔 자들도 있고, 이념의 아버지를 둔 자들도 있다. ‘나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케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죽고, 비로소 아버지를 장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가나안으로 이사했다. 아버지를 장사한다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이다. 육신의 아버지를 장사하는 것처럼, 사상의 아버지를 장사지내는 것은 정권의 탄핵보다 힘든 일이다. 영화 ‘더 복서’에서 주인공은 죽을정도로 맞으면서 상대를 때려 눕혀서 승리를 쟁취했다. 그때, 그의 스승이 조언한다. “승리를 했으면, 그때 굴복하라”고. 굴복속에는 ‘술중독’도 포함되었다. 그 복서는 상대와 싸워 이기는 것만을 추구했는데, 정작 자신과 싸움에서 패배한 술중독자였다. 그리고, 그 복서는 중독자 클럽에 나타나서 “저는 링에서 싸움은 자신있는데, 술은 이길 수 없어요. 자신이 없어요. 도와주세요”라고 자백한다. 굴복이 곧 자신을 장사지낸 것이다. 장사(葬事)는 묻었다는 것이다.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우리는 주님을 따라야한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권력이 가진 자들과 싸우게 하고, 우리는 주님을 따라야한다. 돈이 있는 자들은 돈이 있는 자들과 살게 하고, 우리는 주님을 따라야한다. 세상은 세상에 있게 하고, 우리는 주님을 따라야한다.
그 제자는 주님을 따랐다. 아버지 장례식까지 못가게 하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간 곳은 공동묘지였다. 갈릴리 바다 광풍으로 죽을뻔한 ‘위기’를 뚫고서 가다라 공동묘지에 도착하니, 군대귀신 들린자 둘이 있었다. 그리고, 주님은 돼지떼를 희생시키면서 그들을 치료하셨다. 아버지 장례식에 불참한 제자와 함께 주님은 그 시대의 공동묘지, 그 시대의 장례식, 구약의 모든 장례식에 참여하신 것이다.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을 장사하고, 주님은 근본의 장례식에서 귀신을 물리치고 살릴 자를 살리신다. 귀신들린 둘을 온전케 하신 주님의 사랑이 그것이다. 근본의 장례식은 영혼을 살리는 것이다. 공동묘지에 있던 귀신들린 둘속에 그 제자의 아버지 영혼도 있었을 것이요, 구약의 모든 영혼들이 있었을 것이다. 귀신들린 둘의 치료가 어찌 ‘두사람’만 의미하겠는가? 한자어로 林은 ‘숲’이고, 森은 ‘밀림’이다. 나무 두그루가 ‘숲’이고, 나무 세그루가 ‘밀림’이듯이, 두 사람의 치유됨은 그 시대 백성과 구약의 죽은 영혼들을 상징한다.
그 제자가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소서”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근본의 장례식’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각자의 사상적 아버지를 장사해야한다. 베드로와 요한과 안드레는 세례요한을 사상의 아버지로 따랐다. 그들도 세례요한을 사상적으로 장사지내는데 상당한 시일이 걸렸을 것이다. ‘세례요한이 설정한 인식관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면 걸림이 많았을 것이다. 세례요한의 관점에서는 예수님의 사역에 물음표가 생길 수 밖에 없다. 엘리야가 갈멜산 전투를 끝내고 낙망에 빠지듯 그렇다. 세상의 승리는 근본의 승리가 아니라서 그렇다.
마태가 왜 마태복음 4장이 끝나고 곧바로 ‘세례요한의 구속사건’을 편집했겠는가? 엘리야처럼 외친 세례요한은 갈멜산 전투후에 낙담에 빠져서 호렙산에서 죽기를 구했다. 마태복음 4장은 근본의 갈멜산 전투이며, 마귀와 전쟁에서 이기신 주님의 승리다. 엘리야의 심령으로 온 세례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면서 모든 사명의 핵심을 완수했고, 엘리야의 준비된 터전에서 영적 갈멜산 전투를 승리로 끝낸 것이다. 마태는 엘리야의 예언이 예수님으로 성취됨을 말한 것이다. 세례요한은 예언자요, 선지자이므로, 그가 예수님의 사명을 믿고 섬김을 하든, 하지 않든, 선지자의 사명을 할 뿐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그림자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근본육체로서 얼굴이다.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장사케 하고, 각자의 사상적 아버지를 장사하고, 오직 주님을 따라야한다. 주님의 말씀 외에 누구도 사상의 남편이 될 수 없고, 근본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 아버지는 오직 하나님이고, 믿음의 남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또한 진리의 성령이 하나님을 깨닫게 하는 아름다운 중보자이다. 진리의 성령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세상 지식은 장사지내야한다. 분서갱유(焚書坑儒)하면, 주님께서 부활시키신다.
엘리야나 세례요한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권력쟁취’로 착각했다. 착각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처럼 백성들의 신앙에 보다 집중했을 것이다. 권력자들의 행위는 권력자들로 장사케 하고, 주님은 공동묘지에 묶인 귀신들린 자를 살리셨다. 공동묘지는 곧 이스라엘 땅이며, 권력의 무덤속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공동묘지에 쇠사슬로 묶인 귀신들린 자들이 풀려난 것이다. 광복절(光復節)은 식민지에 빠진 한반도에 일본이 물러간 것이다. 공동묘지에 주님이 나타나시니, 귀신들린 자에게 자유가 선포되었다. 빌라도 감옥에 주님이 나타나시니, 갇혔던 바라바에게 자유가 선포되었다. 골고다 십자가에 주님이 나타나시니, 묶였던 강도에게 낙원이 허락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어둠에 있는 자들에게 빛을,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슬픔에 빠진 자들에게 기쁨을, 죄악에 갇힌 자들에게 해방을 주신 것이다. 가다라 공동묘지 사건은 이사야서 61장의 예언을 성취한 것이다.
*** 태어난 고향을 성지로, 약속의 가나안으로 받은 자는 성경에 없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버렸고, 가나안을 약속받았다. 모세는 고향 이집트를 버렸고, 가나안을 약속받았다. 모세에게 제2의 고향은 시내산이다. 그곳에서 모세는 겨우 1년 거주하고,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으로 행진했다. 이 땅은 잠시 머무는 시내산일 뿐이다. 예수님도 주소지를 4번 옮기시고, 나중엔 거처없이 다니셨다. 영원한 주소지가 하늘고향이라서 그렇다. 약속의 가나안이 고향땅이라는 자마다 모세가 이집트 궁궐에 거하는 것과 같고, 모세가 시내산에 머무는 것과 같아서, 영원한 신광야 광야길로 남겨질 뿐이다.
[이사야서 61장]
1.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복음 4:17]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마태복음 11장]
2.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