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인격으로 이 땅에 오셨다. 아멘!!
오늘은 2월 8일 마태복음 8장을 읽는다. 8장에는 나병환자와 중풍병자와 감기환자를 고쳐주신 예수님의 인품이 나온다. 산상수훈을 마치고 내려오자마자, 지상천국의 청사진을 발표하자마자, 나병환자가 손을 내밀었다. 주님은 나병환자의 손을 외면하지 않았다. 1999년 내 손을 외면하지 않은 주님의 사랑이 느껴졌다. 그리고, 2009년 이혼당했을 때 나를 외면하지 않으신 그때 나의 주님이 생각났다. 그리고 내게 말씀의 세계로 새롭게 인도한 어떤 목사님이 떠올랐다. 모두 내게 소중한 주님의 손길이다.
8장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거주하시는 가버나움 동네에서 병든 환자를 고치신 것, 건너편 가다라 지방까지 건너가서 공동묘지의 군대귀신 들린 자를 치료하신 것이다. 가버나움에 사시면서, 나병환자와 중풍병자와 감기환자(베드로 장모)를 고치신 것은 생활속에서 펼쳐지는 잔잔한 감동이 느껴진다.
반면, 가다라 지방으로 건너간 예수님의 사역은 ‘전투하듯’ 목숨을 걸고 행하셨다. 오죽 했으면 아버지 장례식에 가려는 제자까지 데리고 가셨을까? 갈릴리 호수를 건너면서 미친 광풍이 몰아쳤고, 공동묘지에서 마주친 2명의 미친놈은 인간광풍 자체였다. 주님은 그들을 고치셨다. 그들은 이후 어찌 되었을까?
예수님은 공동묘지 귀신들린 자를 치료하면서 댓가를 너무 많이 지불했다. 가장 큰 댓가는 돼지떼 몰살 사건이다. 2천마리 돼지떼가 바다에 빠져 죽었다. 돼지떼 사장은 경제적 손실이 상당했을 것이다.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면,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돼지떼 몰살 사건 때문에 예수님은 가다라 도시에 출입이 금지당했다. 이러한 댓가를 지불하고,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셨다. 그들은 무엇을 했을까?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주님은 많은 댓가를 지불하셨다. 왜? 그러한 기회비용을 지불하셨을까? 깊은 감사의 제단을 쌓았다. 내게 의로움을 주시려고 죄의 자리에 앉으신 주님의 은혜를 사랑하면서, 나는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오늘도 기도하노라. 내가 떠난 그곳의 성직자를 위해서, 그때 나의 주님을 위해서, 친구를 위해서, 애닯게 기도한다.
“내 펜을 꺽으소서”라고 기도했더니, “알았다”라는 감동이 왔다. 그리고, 나는 펜을 새롭게 들었다. 내가 알기 어려운 성령의 깊이다. 글을 쓰는 일은 고단한 일이나, 성령에 이끌려 내가 살아갈 소명이 이것이라면, 내 마음을 꺽노라. 그리고, 마태복음 8장 28절 가다라 공동묘지 사건을 읽는데, 영락없이 ‘나의 과거’다.
나는 1992년 국민대 뒷산에서 텐트를 치고 살았다. 냄비를 사서 밥을 해먹으면서 살았는데, 그때 그시절이 스쳤다. 밤이 되면 하늘에 별이 보였으나, 삼각산에서 기도하는 소리가 무섭게 내려왔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원룸이 있고, 노트북이 있고, 성경을 묵상하고, 주님을 추억한다. 내가 살아온 33년의 신앙은 ‘아름다운 인생길’이다. 새롭게 알아갈 모든 사람들을 따뜻한 인품으로 품어보리라.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세례요한에게 “네가 엘리야냐”라고 물으니, 세례요한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세례요한은 인간적으로 엘리야가 아닌 것이다.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꼭두각시로 살았겠는가?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메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는다고 해서,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아바타로 살았겠는가? 세례요한은 세례요한이다. 사명은 ‘옷’에 불과하다. 사람의 옷을 입고 사람이 사는 일이다. 인격이 중요한 것이다. 나는 예수님이 마지막 밤에 제자들과 식사를 하신 성만찬이 너무 좋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세족식도 너무 눈물겹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제자들이 제정신을 차릴 줄 알았는데, 모두 디베랴 호수로 고기잡겠다고 가버리자, 부활의 영체로 살아나신 예수님이 디베랴 호수로 직접 찾아간 것도 너무 인격적이다. 조반을 먹으면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대목도 얼마나 아름다운 ‘연인의 사랑’인가? 어떤 성경학자는 그 사건을 두고 “3번 부인해서 3번 사랑으로 복직했다”라고 하는데, 그것은 성경해석일 뿐이다. 베드로와 예수님의 그 사랑의 언약을 그 누가 알겠는가? 이런 예수님,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인격으로 내게 오는 모든 사람을 ‘예수의 사람들’이라고 고백한다. 종파를 떠나서, 무신론일지라도 예수의 인품을 가졌다면, 나는 그들이 좋다. 예수의 사명을 가진 삭막한 신앙인들보다 신앙이 없지만, 예수의 향기를 가진 자들이 더 따뜻하다.
예수님은 인격으로 내게 오신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