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주일을 살면서, 여러 책을 보고, 뉴스를 보고, 드라마를 보고, 내가 다니는 교회 설교문 요약노트를 자주 꺼내 읽고, 내가 다니지 않는 교회 설교문을 읽으며 분석하고, 영화를 본다. 내게는 들려오는 모든 사건이 하나님과 미래와 나와 세상을 내다보는 ‘계시의 창문’으로 열려있다. ‘빌라도 학살소식과 실로암 망대 붕괴사건’의 성경말씀을 보면, 주님도 세상뉴스를 시대를 내다보는 창문으로 여기심을 알 수 있다. 또한,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시듯, 동방박사의 예물을 받으시듯, 종교와 이념이 다른 단체의 가르침도 허용하심을 알 수 있다. 또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유대교의 율법을 준수하고 가르치면서도 ‘지식의 분별력’을 강화하심을 알 수 있다.
얼마전, 프란체스코 교황이 코란국가 아랍에미리트를 지난 6일 방문했다. 음력의 새해를 맞는 그 때, 영적인 새해를 열 듯 교황은 평화의 메시지를 ‘원수의 나라’로 날아갔다. 마태복음 3장, 요단강물에서 물세례를 받자, 성령이 비둘기처럼 예수님께 내려왔다고 했다. 땅에서는 물세례, 하늘에서는 성령세례가 일어난 그 장면이 불현 듯 ‘프란체스코 교황의 모습’과 겹쳐서 상상의 날개가 펼쳐졌다. 나는 교황이 이 시대 구원과 평화의 영적 사명을 받았는지, 아닌지, 알지는 못하겠다. 오로지 그는 인류앞에 ‘평화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으니, 그의 위험한 행위가 평화적 말씀이 됨을 부인할 수가 없다. 교황의 행위는 이미 인격적 말씀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세계뉴스로 말씀하신다.
당시 열린 ‘인류 박애 글로벌 컨퍼런스’에서 폴란드의 최고 랍비(유대교 종교 지도자)인 마이클 슈드리히는 “신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는데 각기 다른 종교에서 내세우는 길이 상이한 점을 포함하여 사람들이 사물을 달리 보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있어 상호관용을 베풀 것“을 제안했다.
또한 8일 교황은 아랍에미리트 수도 아부다비를 방문해서,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형태의 폭력은 주저 없이 사라져야 합니다. 형제에 대한 증오와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해선 안 됩니다“라고 말씀했다.
대한민국의 원수는 두 곳이다. 진보는 일본이 원수요, 보수는 북한이 원수다. 2개의 원수를 가진 대한민국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를 상호 원수로 규정하고 치열한 이념전쟁을 하고 있다. 까마귀와 비둘기는 홍수심판이 끝나는 예표로 사용되었다. 1300년간 담을 쌓고 살았던 천주교와 이슬람의 대적관계는 4천년 전으로 올라간다. 같은 집에서 살던 사라와 하갈의 싸움이, 이삭과 이스마엘의 싸움이, 사라의 부족한 포용이, 하갈의 가시돋힌 교만이, 지금의 ‘기독교+유대교+이슬람’끼리 종교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인류는 종교를 통해 구원을 받길 원하건만, 어떤 종교가 옳은지 분별하는데 사람의 생명이 도구처럼 활용되는 종교전쟁의 시대가 되었으니, 아!! 이 비극은 언제나 종전선언되려나?
“원수를 축복하라”
[마태복음 5장]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유대인에게는 2명의 원수가 있었으니, 사마리아인과 로마인이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시며 대화식 토론을 하셨다. 또한, 누가복음 10장에서 어떤 율법학자와 ‘영생과 구원’에 대해 열린 토론에 참여했다. 그때 예수님은 ‘사랑해야할 이웃’을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정의했다. 강도를 만난 자를 도와준 자가 ‘선한 사마리이인’이므로….. 원수의 도움을 받았으면, 그 원수가 그 사건의 이웃이요, 구원주이다. 엘리야가 배가 고플 때, 요단강에서는 까마귀들이 그날의 경제적 이웃이요, 구원주이다. 까마귀가 우상숭배자라면, 엘리야는 이웃을 사랑했어야 했다.
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원수를 만들어서 구원주의 이름으로 사람을 사탄으로 저주한다. 이런 모반과 모순앞에, 나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축복했던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되새긴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기억해서” 하나님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축복했다고 증언한다. 아브라함을 기억해서 하나님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사랑했듯이, 왜 사라는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하갈을 품지 못하였을까? 왜 이스마엘은 아버지를 생각해서 이삭을 동생답게 품지 못했을까? 사람의 옹졸함과 편협한 이기심은 후손들의 신앙을 ‘좀비처럼’ 괴물로 만들 수도 있으니, 예수님이 이 땅에 평화의 비둘기로 오셨음을, 그리하여 유대와 로마와 사마리아와 중국과 북한까지 그 평화의 날개가 펼쳐졌음을 시인하는 2019년이 되기를 염원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꼭 실천하기를….. 프란체스코 교황처럼!!
그리하여, 나는 올해 무신론과 불교와 이슬람과 다양한 종교와 내가 떠난 곳까지 인격으로 포용하고 이해하며, 내 인생에서 작은 비둘기가 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