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세종사이버대 공개특강 취재를 갔다. 그곳에서 영어공부방법을 배웠다. 어렵지 않았다. “two words a day”를 제안했고, 2단어를 날마다 1년을 해보라고 권면했다. 나는 다짐했다. 반드시 하리라.
그리고 재밌는 영어 어원 이야기(박재형 지음)를 구입했다. 사고보니 상당히 난해하고, 어렵다. 옛날에는 이런 책을 ‘쓰으윽’ 읽고서 ‘잘썼네’라고 했을텐데, “하루에 단어 2개”의 조건을 수행하려고, 오늘 날짜의 11번(p32)를 펼쳐서, 딱 2개 단어만 골랐다. 골라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나의 교회는 목사님 덕분에 헬라어의 속성을 간혹 듣는다. 헬라어에서 명령형은 “지속적, 습관적, 반복적”의 의미가 포함된다. 헬라어 명령형은 ‘미분과 적분의 원리’를 의미한다. 엄청난 양도 미분으로 나눠서 적분하면 충분히 감당할만한 힘을 제공한다. “하루에 두 단어”는 내게 이미 “700개 단어”를 적분시킨다. 적금을 탄 소년처럼 나는 단어가 벌써 배부르다.
오늘 단어는 egoist(.이고이스트)와 altruist(앨트루이스트)이다. ego(이고)가 ‘나’의 뜻이고, alter가 ‘남’의 뜻이다. 자기만을 위하는 자를 이기주의자라고 한다. 반면, 세상만을 사랑하는 자를 이타주의자라고 한다. 우리는 이타주의자를 동경하지만, 모든 이타주의자는 이기주의를 통해서 가능하다. 자신을 위하지 않고서 상대를 위하는 자가 어디에 있을까?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가 치열하게 싸웠다. 지금 시대와 흡사했던 것 같다. 사뭇, 그 시대 베드로 교회와 요한 교회와 바울 교회와 안디옥 교회와 니고데모 교회가 각각 어떻게 운영되었고, 성도들의 소통은 어떻게 진행되었고, 예배와 선교는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다.
마태복음에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 반면 요한복음에는 “너희끼리 사랑하라”고 했다. 마태복음을 보면 “이타주의”(altruist)로 보이고, 요한복음을 보면 “이기주의(egoist)”로 보인다. 내면을 들여다보면, 요한복음이 극단적 이타주의임을 알 수 잇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폐쇄적 이기주의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들은 이미 ‘원수를 포용함으로’ 폐쇄당했다. 유대교에서 받아주지 않은 자들이 모여있는 곳이 바로 요한공동체였다. 정치적 소외계층으로 사마리아인과 종교적 소외계층으로 세례요한 제자들이 뭉쳐서 ‘원수를 사랑하듯’ 결합된 공동체가 요한공동체였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곧 ‘원수를 사랑하는 고통’이 있었다.
나를 닮았나? 나와 다른가? 닮든, 다르든, 내가 나를 사랑하듯, 나와 연결된 주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먼 이웃을 사랑함이다. 북한을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북한보다 ‘가깝고 먼 그대’로 등을 돌린 보수와 진보의 삼팔선은 언제 허물려나?
언젠가 요한복음 강해설교를 들었는데, 그 설교를 듣고 요한복음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복음인줄 미처 몰랐다. 내앞에 4명의 여인이 있다면, 누구와 사랑을 하겠냐고 한다면, 나는 요한복음이라고 말하겠다.
불평등의 사회에서 어떤 외국인이 부모를 상대로 “내 허락을 받지 않고서 나를 낳았다. 평생 살아갈 돈을 부담하라”고 부모에게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고 하던데, 요한복음은 자식이 부모를 결정해서 이 땅에 출현했으니, 오!! 나의 예수님!! 이런 적극적 능동적 탄생의 믿음도 인생을 사는데 큰 유익이 있다. 나는 내가 부모를 선택했고, 단지 기억이 나지 않을 뿐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발상의 전환인가!!
그대는 egoist(.이고이스트)인가? altruist(앨트루이스트)인가? 주님은 극단적 egoist(.이고이스트)로서, 포괄적 altruist(앨트루이스트)를 추구하셨다. 나 자신을 사랑해야, 남을 사랑하는 것이다.
* egoist : 이기주의자
* egoism : 이기주의 (이고이즘)
* altruist : 이타주의자
* altruism : 이타주의(앨트루이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