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번 버스가 지나갔다. 순간, 옛날 교회가 생각났다. 그렇다. “옛날 교회”는 370번 버스를 타고 갔었다. 먼 곳이 된 그 교회는 내 반대편에 있다. 나는 강을 건넜으니, 홍해를 건넌 백성과 모세가 시내산에서 이집트를 바라봄과 같다.
내가 살았던 교회에서 내가 어떻게 행했는지 아는 자들이 거의 없다. 내가 사회적으로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내가 신앙적으로 무엇을 추구했는지, 내가 무엇을 반대했는지, 왜 370번을 싫어했는지, 그것을 잘 모른다. 나는 370번 버스를 그 어느 날, 작정하고 거부했다. 그때부터 나는 기존 교회에 서서히 가지 않았다.
내게 옛날 교회로 돌아가라고 하면, 그것은 누구일지라도 ‘거짓의 성령’이다. 어찌 이집트로 복귀하라고 할 수 있는가? 말씀의 발자국이 암스트롱이 찍은 달나라 발자국처럼 이렇게 분명한데, 신의 발자국은 오직 말씀으로 ‘인’(印)친다.
나는 신문을 성경처럼 즐겨 읽는다. 또한 성경을 신문처럼 쳐다본다. 성경과 신문은 정보의 창문이다. 신문은 현재의 뉴스를 전달하고, 성경은 성령의 뉴스를 전달한다. 그렇게 하루를 살다보면, 내게 마음의 평안이 비둘기처럼 찾아온다. 중년의 언덕은 폭풍이 심하게 몰아치는데, 성령의 은혜로 평온한 저녁을 영접한다.
사도 요한과 막달라 마리아는 관점이 하늘과 땅처럼 달랐다. 모두 사랑인데, 차별적이다. 막달라 마리아의 그 사랑은 육체적이면, 사도 요한의 그 사랑은 성령적이다. 비슷하지만, 달랐다. 예수의 행동과 인격을 모두 목격했으나, 각자 자신의 입장과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누가 성령의 관점에서 보았을까? 오직 사도 요한이다. 성령의 관점은 창세기 1장 2절로 연결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라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 1:3)
하나님의 영은 성령이다. 성령은 빛의 길, 평화의 바다, 맑고 깨끗한 질서의 수면위에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더럽고, 혼돈스러운 흙길과 광풍으로 내려오신다. ‘운행’은 곧 ‘운전’이다. 성령이 자동차라면, 성령의 자동차는 아스팔트를 가지 않고, 흙길을 가면서 그곳에서 ‘빛’을 만드신다. ‘길아닌 곳’에서 길을 만드시는 성령이시다
“가룟 유다의 배신”속에서 주님은 “성령의 약속”을 발견한다. 곧 희생양을 통한 백성의 속죄함이다. 얼마나 깊은 영성으로 인생을 살았으면, 제자의 배신속에서 ‘빛의 성령’을 발견하실 수 있었을까? 배신하는 제자에게 속임을 당하심으로 버려진 십자가의 구원길이다.
사도 요한을 비롯해서, 베드로와 제자 공동체는 ‘가룟 유다의 자살’을 배신죄의 배출구로 삼았을 것이다. 마음의 위안은 되었을 것이다. 베드로가 왜 거꾸로 메달려 십자가에서 죽었겠는가? 평생 가슴에 남아있는 배신죄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과 동일한 고백을 한다. 언젠가 목사님의 강해설교를 통해 들은 말씀인데, 그때 정말로 소름이 돋았다. 평범한데, 오묘했다.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씀함이러라” (요한복음 11:49~52)
그들의 음모는 ‘흑암의 깊음’이고, 그 위에 성령의 바람이 불었으니, 구원의 비밀이 드러난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들의 음모위에 불어오는 미세한 성령의 음성을 들었던 것이다. 세상뉴스는 깊은 흑암이고, 그 위로 불어오는 성령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한다. ‘빌라도 학살뉴스’를 통해서 주님은 ‘심판과 회개의 소리’를 들으시고, 제자들에게 죄의 회개를 촉구하셨다. 성령의 소리는 세상뉴스를 통해서 불어오며, 성령에 속한 자들만 그 소리를 듣고, 성령에 속하지 못한 자들은 흑암의 깊음위로 불어오는 미친 광풍만 들을 뿐이다.
370번 버스가 떠났다. 그리고, 나는 장안동에 교회처럼 남겨졌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