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목사님이 요한복음의 깊은 비밀을 풀어서 설명하시니, 그때부터 요한복음이 새롭게 보였다. 오늘은 2월 11일 마태복음 11장을 읽는 날인데, 요한복음 11장도 함께 읽었더니 그곳에는 막달라 마리아 집안에 일어난 엄청난 기적이 기록되어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이 그곳에 있었으니, “나사로를 살린 것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이다. 성령의 은혜가 없다면 마리아는 결코 받아드릴 수 없는 사건이다. 며칠 후 향유옥합을 부은 것도 ‘장례식을 예비함’이라고 했으니, 마리아의 변명은 무의미하다.
요한복음을 읽었을 막달라 마리아는 이후 어찌 되었을까? 마르다는 또한 어찌 되었을까? 나사로는 어찌 되었을까? 사도 요한같은 인물은 구약시대 ‘미가’ 선지자와 같다. 날카로운 비수를 가지고, 진실의 소리를 토해내는 간언(諫言)은 곧 성령의 목소리다. 성령의 소리는 밀어(密語)이지, 밀어(蜜語)가 아니다. 쓴 독약처럼 비수를 꽂는 성령의 소리가 있다면, 감사함으로 엎드려야한다. 과연, 요한복음을 읽은 막달라 마리아는 요한복음의 문장을 붙잡고 자복했을까? 최소한, 요한복음 11장에서 어떻게 마음을 가졌을까?
내 앞에 다시 드러난 사도 요한은 ‘진실한 순교자’이다. 자신의 모든 명예를 내걸고, 폐쇄적 공동체에 성령과 진리가 머물게 하려고, 여인천하 ▲성모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사마리아 여인을 공식적으로 거론했다. 니고데모는 상당히 원만하게 포장했고, 베드로는 목회권을 부여한 것으로 묘사했으니, ‘감사의 이모티콘’을 듬뿍 받았을 것이다. 3명의 여인은 달랐다. 가까운 사람에게 차가운 비수를 꼽는 것이 성령의 소리일 수도 있다. 허물을 덮는 것과 성령의 소리로 책망하는 것이 과연 어떻게 다를까? 깊게 통찰해야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쓰면서, 최소한 3명의 여인과 그들을 따르는 성도들로부터 ‘지탄의 십자가’를 받아야했다. 사도 요한은 그것을 작정하고 요한복음을 썼던 것이다. 요한은 사건을 기록하였고, 사건의 수면위에 은밀히 불어오는 성령의 소리는 독자가 스스로 깨닫도록 진실을 감췄다. 요한복음은 잘 숙성된 포도주처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