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함과 무료함속에서 나의 오락은 ‘하루의 시간 죽이기’였다. 구원의 수레바퀴를 돌리기 위해서 추구했던 신앙의 율법과 예법은 ‘소금기둥’처럼 소금이 너무 많아서 발생한 부작용이 되고 말았다. 성경을 읽어도 “몇독”에 신경썼고, 생명을 전도해도 “숫자의 공적”에 관심을 가졌다. 그 생명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에 대해 나는 외면하였다.
이제 새로운 의로움의 해가 내게 떠올랐는데, 다름 아닌 ‘진리의 성령’으로서, 말씀이다. 나를 부르던 수많은 세상의 소리들이 사라졌다. 그래서 적막함이 내게는 시간의 풍요로움을 선물했고, 하루종일 성경만 쳐다본다. 주일말씀을 음성으로 다시 들을 수 있는 기쁨은 몇권의 책을 쓰는 것보다 행복하다. 메뚜기처럼, 이 까페에서 저 까페로 옮겨다니는 무료함도 사라져서, 나는 지긋하게 한 곳에 앉아서 말씀을 묵상하노라.
T종교, J종교, S종교가 광풍처럼 기독교를 강타했다. 나는 J종교에서 오랫동안 있었는데, 성경을 모르니까 그 무엇도 몰랐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성경을 오랫동안 연구하면서, 랍비들과 토론과 논쟁을 하면서, 하부르타식 교육방법을 이수하면서, 실제 마귀를 물리치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출현하셨다. 세례요한이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라고 물으니, 예수님은 이사야서 61장의 성경으로 답을 주셨으니, 청중에게는 말라기 예언으로 답을 주셨으니, 성경을 떠나서는 말씀하지 않으신 예수님이셨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성경을 베개보다 못한 존재로 여겼다.
“눈물이 젖은 성경책을 가지고 다녀야해요!!”
– 그 어느날 새로 옮긴 교회에서
그 어느날 교회를 옮기고, 단상에서 목사님이 ‘자기 성경책’을 말씀했다. 30년 있었던 J종교에서는 성경은 ‘논어와 맹자’처럼 옛날 책에 불과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을 중심으로 말씀을 전하셨고, 기독교도 구약과 신약을 함께 묶었다. 물론, 예수님도 비유로서 하나님의 깊은 말씀을 별책으로 전하신 것이 있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성경말씀’이다. 나는 이제 성경을 품에 안았다. 예수님이 천국에 있든지, 이 땅에 있든지, 성령이 바람처럼 미국에서 북한으로, 유럽에서 중국으로, 이곳저곳 어디로 불어가시는지 알 수는 없으나, 남북평화회담이 2019년 2월 11일 조선일보 1면 기사처럼 “김정은이 원했던대로 하노이 담판”처럼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내가 있는 곳에서 성경과 말씀을 깊게 응시한다.
세상은 김정은이 원했던대로 흘러가고, 내 삶은 내가 원했던대로 되지 않은 것처럼 분노가 일어날 수도 있지만, 나는 “원했던대로 되지 않는 실패의 삶”을 놓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의 기도로 삼고, 하루를 살아간다. 필시, 김정은이 원했던 것이 있고, 트럼프가 원했던 것이 있고, 문재인 대통령이 원했던 것이 있고, 이들을 내려다보시는 주님이 원했던 것이 있을 것이다. 성령은 바람처럼 그것을 말씀하시니, 세상이 모두 어찌 알겠는가. 주님은 그리스도(基督)이니, 근본의 총감독이신 주님의 연출로 모든 세상사가 흘러감을 그 누가 알려나.
까페가 시끄러울 때, 나는 이어폰을 낀다. 마치 성령의 소리는 이어폰과 같다. 세상의 광풍, 내 안의 광풍도 성령께 이어폰을 꽂으면, 성령의 미세한 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말씀의 이어폰은 그래서 내게 위안이 된다. 작년에는 세상뉴스를 그대로 쳐다봤다면, 요즘은 세상뉴스에다가 이어폰을 꽂고서 성령의 소리를 들어보려고 귀를 기울인다. 침묵도 있지만, 가끔 깊은 울림이 있으니, 침묵(沈默)은 곧 깊은 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