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월 13일 마태복음 13장을 읽는다. 나의 달력은 성경이다. 날짜는 성경 챕터로 넘어간다. 어쩌다 여유가 있으면, 음력의 달력으로 요한복음을 펼치거나, 구약의 달력을 펼친다. 그렇다. 성경은 음력과 양력이 있으니, 구약과 신약이요, 예수와 성령이다.
마태복음 13장은 천국장(天國章)이라고 할 수 있다. 발음은 ‘청국장’이라고 하지만, 내용은 천국의 각종 비밀이 비유로 농축되어 있다. 천국은 밭에 있고, 밭속에 있고, 상품에 있고, 누룽지에 있고, 고기잡는 그물에 있고, 겨자씨에 있다. 예수님의 천국설명은 참 쉽고, 깊고, 어렵다.
쉽다는 것은 일상의 언어로 표현된 것이고, 깊다는 것은 깊게 음미하면 발견되는 것이요, 어렵다는 것은 ‘들어도 들리지 않거나, 봐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 빠질 수 있음이다. 깨달으면 ‘보물’이고, 못 깨달으면 ‘허풍’으로 들린다. 마태복음 13장의 천국비유는 ‘천국’을 빼고 읽어보면 그냥 평범한 일상이다. 백성들은 예수님을 “농사꾼이거나 어부의 친구들”로 오해할 수도 있다.
▲4가지 밭비유 ▲곡식과 가라지 ▲겨자씨 천국 ▲누룩 천국 ▲밭에 감추인 보화 ▲비싼 진주 찾는 장사꾼 ▲그물질하는 어부 ▲창고에서 물건 꺼내는 주인 등의 8가지 천국비유가 나온다. 4가지 밭비유와 가라지 비유는 예수님이 설명을 했고, 나머지는 하지 않았다. 13장 말미에 예수님은 고향에 갔으나, 푸대접받았다. 고향에서 푸대접받은 내용은 내게 무척 위안이 된다.
마태복음 12장 말미에서 예수님 가족이 찾아왔다. 예수님은 “모른체” 안면몰수했다. 그 이유는 가족들이 예수님을 오해해서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고향으로 방문하신다. 그런데, 고향에서 역시 예수님을 푸대접했다. 보이는 것만을 보는 자들은 언제나 인식이 그와 같다. 고향은 유대교를 상징한다.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내 자매요 어머니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 선언으로 어머니 마리아는 ‘혈육의 어머니’로 구분된다. 어머니 마리아는 ‘약속의 마리아’가 되었을까? 요한복음은 어머니 마리아의 신앙에 대해 은밀히 경고한다.
누가복음에서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위대한 어머니’로 추앙받는다. 그런데, 마태가 본 어머니 마리아는 정반대였다. 이렇게 상반된 입장차이는 왜 발생한 것일까?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사람은 서서히 변화하는 것이므로, 각자 본 상태에서 기록한 것이다. 요한은 십자가 사건 이후 ‘어머니 마리아’를 기록한다. 십자가 밑에 어머니 마리아가 분명 있었고, 그때 예수님은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부탁한다. 이것은 봉양의 의미가 아니다.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의 신앙을 맡겼던 것이다.
어머니 마리아는 과연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로 거듭났을까?
요한복음에는 4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1) 어머니 마리아 2) 사마리아 여인 3) 베다니 마리아 4) 막달라 마리아. 4명의 여자들은 모두 성령은 충만했는데, 1% 부족했다. 예수님에 대한 인식관이 엉뚱했다. 진리의 말씀이 약했다. 요한복음은 4명의 여자들에게 은밀히 경고한다. 성령의 책망은 진리를 통해 나간다. 성령에 충만한 자들은 진리의 책망을 받을 줄 알아야한다. 진리의 책망을 듣지 못하는 성령충만은 ‘거짓 성령’일 수도 있다. 성령에 충만한 자들은 진리의 구속을 받아야한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말한다.
1) 어머니 마리아는 성령으로 예수님을 낳은 자이다.
2) 사마리아 여인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은 자이다.
3) 베다니 마리아는 향유옥합으로 예수님을 사랑한 자이다.
4) 막달라 마리아는 영안이 열려 부활의 예수를 만난 자이다.
4명의 여인은 진리로 거듭났을까?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이들의 신앙이 결국 어찌 되었는지, 기록으로 남겨놓지는 않았다. 비밀에 덮였다. 단지, 가룟 유다는 ‘12사도에 있었으나 속하지 않은 자’로 구별됐다. 그처럼, 여인들중에서 ‘성령에 속했으나 속하지 않은 자’로 구별된 자들이 있었다. 성령충만의 위험성은 ‘진리의 선로’를 벗어날 때 발생한다. 성령이 속도면, 진리는 제어기다. 둘은 반드시 함께 가야한다.
요한1서 2장 19절에 보면,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고 기록한다. 가룟 유다가 12사도에 속했으나, 속하지 못하고 변질됐다. 그처럼, 요한공동체에 속했다가 나간 무리가 있었다. 요한공동체에 속했던 무리는 4명의 여인들이다. 곧, 1) 어머니 마리아 2) 사마리아 여인 3) 베다니 마리아 4) 막달라 마리아 등이다.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 거론하면, 그는 사도중의 사도로 불리는 위대한 인물이다. 마리아 복음서도 썼다. 그런데, 위경이다. 왜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첫 증인으로서 ‘첫 열매’가 되지 못하였을까? 요한이 볼 때 ‘부활의 첫 열매’는 본인을 제외하고 ‘의심많은 도마’였다. 요한의 관점이 진리는 아니지만, 진리에 가깝다고 허용하면, 기막힌 반전앞에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하는가?
[요한복음 20:14]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중략)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엿노라
[요한복음 20: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보고, 키우고, 만지고, 붙들고, 알고, 살았던 여인은 어머니 마리아요, 막달라 마리아요, 베다니 마리아요, 사마리아 여인이다. 특히 어머니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낳은 자로서 유년시절을 모두 알고 있다. 어머니 마리아는 “알았으나 몰랐던” 눈뜬 봉사였던 것이다. 보는 것이 무엇인가? 아는 것이 무엇인가? 막달라 마리아는 영안이 열려서 뭔가를 보았으나,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동산지기로 착각했다. 혹여, 우리는 주님을 믿으면서 주님이 우리 인생을 지키는 ‘동산지기’로 여기는 것은 아닌가? 주님은 동산지기가 아니다.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다.
모르긴 몰라도,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4명의 여인중에 1명이 요한1서 2장에 나오는 ‘적그리스도’일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가룟유다’를 등장시켜, 요한은 4명의 여인들에게 ‘영적 가룟유다’의 위험성을 경고한 것이다. 요한을 통해 ‘진리의 성령’이 책망한 것이다. 진리가 없는 성령충만은 ‘미친 광풍을 넣은 헬륨풍선’일 뿐이다. 각 교파마다 “내가 성령이다”라고 할 때마다, 나는 ‘적그리스도’가 연상된다. 적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위장한다. 나의 과민반응인가? 나는 과민반응함으로 진리를 중심한 성령을 추구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