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은 목사님을 만남으로, 성경의 문속으로 들어갔다. 예수님은 성경이 ‘당신’을 증거한다고 했고, 사도 요한은 “태초의 말씀”을 ‘인격화’해서 “말씀이 예수다”라고 선언했다. 살았으나 사라진 역사적 예수를 성경으로 복원한 것이다. 예수를 못본 성도들이나, 현대인들에게 “말씀”이 곧 “예수”다. 성경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반복의 훈련은 천국에 갔다가 내려오는 지적 영성 훈련이다.
신앙은 스스로 양육해야한다. 중요한 것은 참 목자를 만나는 것이다. 누가 참목자인가? 옛날에는 ‘사명’을 생각했는데, 모두 허탄한 탐욕일 뿐이다. 엘리야의 사명으로 왔던 세례요한조차 자신의 사명을 ‘없는 것’처럼 강한 부정을 했으니, 진정한 사명은 ‘하나님을 향한 소명’에 있다. 곧, 성경을 보는 눈, 기도하는 입, 성령을 듣는 귀, 생명을 사랑하는 숨결이다. 신령한 이목구비(耳目口鼻)를 갖추는 영성훈련을 하는 곳이 좋은 교회다.
언젠가 목사님이 내게 “성경은 소제목으로 읽으면 좋다”라고 조언했다. 나는 그 방법을 따랐다. 그때부터 성경의 윤곽이 서서히 잡히기 시작했다. 성경이 보이면서, 성경속에 숨어있는 맥락이 보이면서, 주님이 내게 출현하기 시작하신다. 성경을 읽는 맛은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다. 이것이 ‘지식의 옷을 입은 진리’의 주님이다.
언젠가 목사님이 전체에게 “말씀묵상과 함께 기도가 중요하다”라고 조언했다. 나는 그 방법을 따랐다. 그때부터 성령의 소리가 내 마음의 수면에 임하는 신비한 체험이 느껴졌다. 신비한 일이다. 영성훈련은 좋은 목자를 만나서, 좋은 방법을 따라서 행하는 것이다.
오늘은 2월 15일, 마태복음 15장을 읽는다. 어제 14장에서는 사사(四死)로서, 세례요한의 죽음이 등장한다. 세례요한은 3장에서 세례를 주고, 4장에서 옥에 갇히고, 11장에서 옥중질문을 예수님께 보내고, 14장에서 헤롯에게 죽임을 당한다. 같은 교회소속이 아닌 두 사명자는 이처럼 긴밀하게 유대관계를 맺으면서 ‘협력하는 신앙공동체’를 이루셨는데, 그 세례요한이 죽었다.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처음 접한 예수님은 심경이 막막했을 것이다. 함께 의지하고, 뜻을 이룰 동역자가 붙잡혔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는가? 세례요한이 없는 그들의 공동체에서 예수님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14장에서 세례요한의 장례식 소식을 듣고, 예수님은 “배를 타고 떠나서 따로 빈들에 가셨다”고 했다. 예수님의 당시 심경이 ‘따로 빈들’로 대변된다. 그런 상황에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을 행하셨고, 15장에서는 칠병이어 사건을 행하셨다.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을 선포하셨는데, 기존 종교인들에게는 “완성된 율법”이므로, 예수님의 선포는 ‘혁명적 도전’으로 비쳐질 수 있는 발언이다. 15장에서 ‘손씻는 전통’을 문제삼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가라지”로 규정하신다. 13장 천국비유에서 ‘곡식과 가라지’ 비유가 있는데, ‘가라지를 가만히 두라’고 했다. 그처럼, 바리새인과 그들의 잘못된 전통이 ‘가라지’와 같고, 잘못된 전통에 뿌리를 둔 그들의 행위가 ‘가라지’다.
예수님은 말씀을 완성하고, 바리새인은 전통으로 말씀을 폐한다. 그런데, 바리새인이 종교권력과 권위가 있으므로, 일반 성도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이 말씀을 폐하고, 어기는 범죄자로 비쳐진다. 그래서 말씀의 분별력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결코 죄가 될 수 없다.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죄’다.
“커피 먹지마, 라면 먹지마”라는 그 말이 법이 되어서 성도들을 죄사실로 옥죄었던 옛날 교회의 지나친 율법주의는 마태복음 15장의 ‘잘못된 전통’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때 누군가 내게 “라면법 폐했어요. 라면이 좋다고 계속 보고를 해서 라면 허용됐어요. 조만간 커피법도 폐할거예요.”라면서, 내게 커피를 권유했다. 그때 그 말을 들으면서, “복음이 무엇인가”라는 심각한 질문을 던졌다. 이후 실제로 그곳에서 커피가 허용됐다. 지금 돌이켜보니, 지나친 율법이 말씀을 변질시키면서, 성도들이 말씀중심 신앙을 하지 못하도록 조장함을 알게 된다.
가나안 여인의 부탁 사건을 보면, “하나님의 명령”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는 것”인데, 예수님은 그것을 폐하고, 가나안 여인에게 먹을 것을 준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결국 ‘커피를 마시는 것’이 죄가 아니고, ‘커피법’이 잘못된 제도로서 ‘죄의 율법’임을 진정 깨닫는다. 오늘, 맛있는 까페라떼 한잔 마시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