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6장과 하루종일 살았다. 옛날엔 하루에 신약 1독 통독, 일주일에 구약 1독 통독을 목표했다가 과식의 소화불량에 걸렸는데, 교회에서 목사님이 “성경을 읽지 말고, 성경에 읽히는 성경읽기를 해야한다. 말씀과 독자 사이에 성령이 존재할 수 있는 틈을 둬야한다”라고 내게 조언해주셨다. 그때부터 나는 성경읽기에 부담감이 사라졌고, 즐거운 성경읽기가 시작됐다. 16일은 마태복음 16장이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합작해서, “하늘에서 온 표적”을 요구했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강력한 공격이었다. 이때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을 다시 언급하셨다. 세례요한도 죽고, 말귀를 못알아듣는 제자들과 함께 막막했을 예수님께, 기적이 일어났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한 것이다. 베드로가 ‘생명의 표적’이었다. 아멘!!
아뿔싸!! 베드로가 십자가를 반대하니, 베드로가 영락없이 “요나의 표적”이었다. 요나처럼 딴 길로 가려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얼마나 당혹했을까?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베드로의 입장도 충분히 짐작한다. 생계를 책임져야할 가장(家長)으로서 베드로는 3년 넘게 집에 생계비를 보내지도 못하고, 정권탈환의 새로운 청사진을 보았는데, “십자가”를 말하니,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변화산상을 보여주시며, 영적인 세계의 신비한 체험을 알게 해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결국 죽음의 십자가앞에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요나처럼!!
부활의 주님은 베드로의 멱살을 잡고 ‘배신의 죄값’을 물으실 수도 있을텐데….. 디베랴 호수에서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니, 그 아름다운 인격앞에 나도 요나처럼 인생의 방향을 되돌린다. 예수님께 내 인생도 작은 요나의 표적이 되고싶어서, 겸손히 회개의 기도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