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자치가 강해지면서 교권이 약해졌지만, 학교 교실은 살아났다. 시끄러운 소음은 생명력의 증거다. 자기 의사표현이 강할수록 자기 정체성이 뚜렷해진다. 마태복음 18장과 19장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교육방법도 하부르타식으로 ‘제자들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개성적으로 양육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반대했다. 베드로가 ‘제자들의 십자가’를 진 것이다. 그리고 ‘일시적 사탄’이 되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권력암투를 했고, 예수님께 ‘대표자’를 선임해달라고 요청했다. ‘십자가 죽음’ 이후에 권력구조를 물었던 것이다. ‘예수님!! 후계자를 지목하고 죽으시죠’라는 의미가 함축된 것이다. 제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질문한다. 한국적 사고방식에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이것이 하부르타식 교육방법이다. 질문의 싹은 절대로 자르면 안된다. 예수님의 교육방식에 100% 공감한다.
부자청년 사건도 동일하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말을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로 잘못 알아들은 부자청년은 크게 근심하고 떠났다. 그런데, 제자들이 더 크게 근심했다. 부자가 되고싶은 제자들의 순수한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찾아온 것이다. 제자들은 이때도 묻는다. “누가 구원을 얻겠습니까?”라고. 베드로도 묻는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는데 우리는 무엇을 얻습니까?”라고.
제자들의 질문은 살아있고, 고래처럼 생동적이다. 예수님은 결코 반대의견을 묵살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는다. 이것이 지도자의 리더쉽이다. 부활의 주님이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자, 같은 질문을 3번 반복하니, 베드로는 근심하며 대답한다. 이것이 하부르타식 교육방법이다. 개성이 살아있도록 존중하는 예수님의 인품을 알아야한다.
내가 떠난 곳은 주일말씀과 새벽말씀이 엄청났다. 감당하기 어려운 정보량이다. 종교탐방을 다니면서 박옥수 목사님의 기쁜소식 선교회를 방문했다가 깜짝 놀랬다. 그곳은 말씀이 빈약했다. 그런데, 살아있었다. 생동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무슨 차이일까?
기쁜소식 선교회는 각 교회마다 목회자가 스스로 설교권을 가지고 설교했다. 그러니, 살아있는 것이다. 교육부는 교육과정을 학교에 내려보내면, 그 교육과정을 중심해서 교사가 알아서 자율적으로 진행한다. 그래서 교사들의 교권이 살아있는 것이다. 로봇처럼 교사가 ‘하나의 틀’로 움직인다면, 무미건조한 교실이 될 수밖에 없다. 그곳은 집사도 말씀을 전하는 능력이 있다. 옛날 교회는 강사 교육을 몇 번씩 들어도 강의를 못했다. 왜 이렇게 다를까? 교육 시스템이 달라서 그런 것이다. ‘성도를 양육하는 제도’에 있어서는 기쁜소식 선교회가 탁월하다.
내가 떠났던 그곳은 ‘생방송’을 통해 각 교회의 설교권을 박탈했다. 그게 교회부흥에 실패한 치명적 실수였다고 나는 판단한다. 위에서 내려준 설교원고를 외워서 설교하라고 하니, 프로젝트에 띄워서 읽으면서 ‘쇼’를 한다. 그것은 힘이 없다. 설교가 살아있게 해야한다.
‘태양계는 태양을 중심해서 행성이 돈다’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부분만 맞다. 목성의 힘이 존재해서 태양계가 존재한다. 목성이 없다면 태양계의 균형은 유지될 수 없다. 모든 세계가 이와 같다. 혼자서 모든 것을 독점하면, 그 세계는 멈춘다. 이것이 독재의 아이러니다.
예수님이 가장 신뢰했던 인물이 누구인가? 가룟 유다다. 재정을 맡은 자가 바로 가룟 유다다. 믿었으니, 돈을 맡긴 것이다.
아하수에로 왕이 가장 신뢰했던 인물이 누구인가? 하만이다. 왕의 도장을 맡겼던 그가 황후를 죽이려고 했다. 이런 역설이 어디에 있을까?
살아있는 권력, 살아있는 교회, 살아있는 가정, 살아있는 인간관계는 서로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하면서, 상대의견을 묵살하지 않고서 대화를 할 수 있는 관계이다. 질문은 허용되어야한다. 질문을 묵살하는 인간관계가 곧 ‘우상의 속성’을 갖는다. 하만 혼자서 권력을 휘두를 때, 표면은 평화였으나 내면은 ‘신음과 고통과 억압’이 압력밥솥처럼 끓고 있었다. 그런 소리는 열어줘야한다. 그래야 권력도 살고, 사람도 살고, 조직도 산다. 모든 교회, 모든 단체가 동일하다. 반대의견이 자유롭게 표출될 수 있는 조직, 대표자와 대등한 다른 권력이 존재하는 조직, 그런 조직이 살아있는 조직이다. ‘통제되지 않는 권력’을 선악나무처럼 남겨두는 것이 권력의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