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격의 살과 피를 입고 오신 예수님의 의미가 사실상 어렵다. ‘사람이신 예수님의 본질’을 아는 것이 신앙인의 평생 숙제일 것이다. 안다고 하여도, ‘앎’에는 깊이와 높이와 넓이, ‘앎의 체적’이 있는 것 같다.
옛날 교회를 떠나고, 새로운 교회에 정착하면서 ‘막연한 작정기도회’가 사라졌다. 옛날 교회에서는 21일 작정기도회만 수십번 했던 것 같다. 40일 작정기도회도 많이 했었다. 그런데, 왜 성도와 성도가 교류하는 작은 공동체조차 존재할 수 없었을까? 결혼을 해야만, 가족 공동체를 가질 수 있고, 그 방법이 없으면 성도와 성도가 진심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신앙적 모임’을 할 수가 없었다. 중학생도 자유롭게 만드는 동아리가 교회에서는 불가능했다.
가령 ▲평대협 ▲깨어있는 섭리 ▲잠언파 ▲알포유 ▲성령파 등등 자생적으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신앙공동체를 무조건 “잘못된 모임” “귀신들의 집합체” “섭리안의 가라지”로 정죄하면서, ‘하나의 공동체’만 인정했다. 그것이 ‘섭리’다. 오!! 이름만 들어도 가슴 벅찬 ‘섭리’, 그런데, 만져지지 않는 유령같은 존재, 추상의 섭리!!
나는 내 마음에 맞지 않은, 내 성격에 맞지 않은, 다툼이 많았던 내 전처(前妻)와 이혼하고서 가슴이 찢기는 통증이 지금까지 있다. 그런데, ‘섭리의 존재’에서는 헤어진 후에 전처(前妻)와 겪은 그런 통증은 없다. 왜 일까? ‘섭리의 실체’가 살과 피를 입은 실존이 아니어서 그럴 것이다. R과 인격적 교감은 없었으나, 편지로 맺은 관계가 찢기는 통증은 지금도 괴롭다. 이것이 감정이다. ‘감정과 믿음이 존중받는’ 성도들의 작은 신앙공동체가 생겨날 수 없는 교회문화가 결국 선교를 막았고, ‘말씀의 육신화’를 방해했다. 주일말씀은 그 제목을 손바닥에 적어놓지 않으면 까먹는 그런 삶을 살았다.
지금은 사라진 ‘주마음 교회’에 다녔을 때, A할머니가 전입했다. 얼마나 포근하고, 독특하게 생기셨던지…. 그 할머니가 올 때마다 나는 마음을 다했다. 목회자가 내게 “A할머니는 깨섭출신이다”라는 말을 해주기 전까지. “깨섭출신 할머니”라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미 얼어붙었고, 그 할머니는 내 인식관에 ‘빨간줄’이 그어졌다. 내 인식관속에서 그 할머니가 빨간줄이 그어졌는데, 본질적으로 ‘내 인식관에 빨간줄’이 그어졌으니, 빨간줄은 목회자가 내게 그은 것이다. 결국, 교회안에 믿음의 작은 공동체가 없으니, 허공을 향한 막연한 구호만 외치고, ‘아담’만 있고, ‘사람’이 없는 그런 세계에 살았다.
어느 가지에서 열매가 열릴지 아무도 모른다. 성도들끼리 서로 소통하는 다양한 소공동체가 생겨나야만, 내가 떠난 옛날 교회가 제2의 르네상스 시대를 맞을 것이다. 예수님 시대에 바울파, 베드로파, 아볼로파, 요한파, 도마파, 마가파, 바나바파, 막달라 마리아파 등등이 있었다. 이들은 상호 경쟁하면서 협력하는 관계를 가졌다. 유럽의 EU구조다. 섭리는 중국의 1인 독재 권력구조와 같다.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 나뉨”을 비판하면서, ‘나눔을 통한 협력’을 강조했다. 요한공동체에서도 4명의 여인들(어머니 마리아, 사마리아, 베다니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을 중심한 공동체 모임을 요한복음에서 비판하면서도, 인정했다. 그리스도안에서 다양한 모임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30년 넘게, 왜 모든 성도들은 마음 한구석에 ‘낙성대 시절’을 그리워할까? 화려한 돌조경의 월명동에 있으면서, R보다 더 성격이 독특한 동생분들을 보면서도, 왜 마음이 오랫동안 허전했을까? R과 낙성대의 공통분모는 무엇일까? 나의 기억으로는 ‘성도들의 다양한 표현과 제자 공동체’일 것이다. 완벽한 월명동과 화려한 성전은 있는데, 사람 사는 애정이 사라진, 그런 신앙생활을 했었다.
▲평대협 ▲깨어있는 섭리 ▲잠언파 ▲알포유 ▲성령파 등등 이들이 과연 섭리안에서 ‘가라지’였을까? 그들을 가라지로 규정한 그 사상이 ‘가라지’가 아닐는지….. R은 내게 편지로 “너를 가라지로 보는 자가 가라지다”라고 말했다. 누군가 내게 “지금도 늦지 않았다. 돌아오라”고 문자를 사랑스럽게 보냈다. 아멘!! 지금도 늦지 않았다. 주님의 품으로 모두 돌아가자.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하고, 화려한 건물과 권력의 독주에 취한 각자를 각성(覺醒)하고, 잠에서 깨어나자. 나는 ‘섭리의 모두’에게 말하고 싶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돌이키라”고.
황후의 품격 마지막회에서 황후가 말하길, “황실은 뿌리부터 썩었다”고 했다. 그 말이 내게는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스스로 ‘썩은 뿌리’를 절단하겠다는 결단을 해야만,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남으로 가나안에 정착하듯, 각자가 떠나야할 ‘갈대아 우르’는 어디이고, 정착할 ‘신령한 가나안’은 어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