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나가 참 좋다. 도망친 요나, 도망친 마가, 도망친 베드로에서 내 모습이 보이니, 나는 요나가 좋다. 인생은 고단한 삶의 연속이다. 오늘은 요나서를 본문으로 “자아 정체성”을 깊게 말씀했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깊은 물음표가 내게 밀려왔다. 섭리인? 크리스챤? 해병대? 순고생? 언론인? 나는 무엇으로 정의되는가? 요나는 멸망받아 마땅할 니느웨 성읍이 회개함을 분노했고, 유대민족을 상징하는 박넝쿨이 결국 시듦을 보고, 성질에 성질을 냈다. 보편적 인간의 성정이다.
큰 광풍보다는 박넝쿨의 시듦에 민감한 것이 인생이다. 자기와 직접 상관있는 것이면, 광풍처럼 반응한다. 민족이 전쟁에 휩쓸리는 것보다 부부싸움이 더 무서운 광풍이다. 인간의 본성이 그렇다. 그 모든 것을 초월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는 것이 쉽지 않다. 내가 새롭게 옮긴 교회가 십자가의 정신으로 나아가니, 나도 조금씩 변화한다.
식사를 하면서, 어떤 성도분이 “마음의 우울증”을 꺼냈다. 나도 우울증 증세가 있고, 현대인의 보편적 증세이니 동변상련 공감이 가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 기도로 부탁해야겠다’고 생각됐다. 어떤 분이 “인생은 자기 위치에서 만족하는 법을 알아야 행복이 온다”고 했다. 오!! 주님이 그 입술에 있는 것 같았다. 비관적으로 살면, 요나처럼 끝없이 추락한다. 긍적적으로 살면 니느웨처럼 멸망에서 생명을 얻는다.
주일은 꼭 고향에 있는 5일 장날같다. 내 어머니는 장날만 되면, 오전 오후 시간 내서 이사람 저사람 만나면서 지역사회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며 행복하게 살으셨다. 오늘 설교말씀으로 요나를 알게 되고, 궁극적 요나인 예수님도 사귀고, 인생을 새롭게 돌이키신 행동하는 요나도 만나고, 주일이 “행복한 장날”과 같다
어떤 분은 억압받는 피해의식의 딜레마를 놓고 기도하면서 “부모님의 뿌리”를 깊게 깨닫고, 부모님도 결국 그 위의 부모로부터 가부장적 억눌림을 받아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굴레가 계속 유전됨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용서와 사랑으로 살기로 다짐했다고 고백했다. 오!! 자신을 바꾸는 인간혁명이여!! 십자가의 말씀이 사람을 사람답게 변모한다. 물이 포도주가 되듯…. 요나가 돌이키듯….
나는 요나다. 어디쯤 나는 가고 있는 요나일까?
다시스?
배 밑창?
고래배속?
니느웨?
박넝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