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화법(話法)에 관심이 많다. 까페에 오면, 들려오는 옆 좌석의 소리를 간혹 들어본다. 어떻게 말이 흘러가는지, 주도권은 누가 잡고 있는지, 경청의 듣기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대화가 모두 즐거운지, 가끔 들어본다. 화법의 전문가는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항상 제자들의 소리를 자세히 듣고, 또한 질문을 던지신 후에, 제자들의 소리를 듣고, 또한 말씀을 전한 후 제자들의 반응을 묻고 들었다. 들음과 말함은 대화의 기본원칙이다.
한양대 교수였다. 블로그 강의를 들었다. 엄청난 강의를 기대했는데, 1시간 강의에 그 교수는 10분밖에 하지 않았다. “블로그가 뭐라고 생각해요”라고 묻더니, 참석한 20명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모두 짧게 말했는데, 질문이 주어지면 20분이 흘렀다. “여러분의 관심사는 뭐죠?”라는 질문, “오늘 강의 어땠어요?”라는 질문으로 끝냈다. 놀랍게도, 모든 청중이 “강의가 정말 탁월했어요, 블로그의 눈을 떴어요”라고 했다. 신비했다. 대화식 강의를 그때 처음 봤다.
대화가 즐겁지 않은 것은 ‘경청의 부족’ 때문이다. 화법에 있어서 나도 초보운전이다. 말할 기회가 주어지면, 말의 주권을 우상처럼 놓치기 싫어한다. 누구나 그렇다. 권력은 분배될 때, 모두가 행복하다. 말도 그렇다. 말은 물처럼 흘러야하고, 흐르기 위해서는 경청의 자세가 필수다.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그 말에 반응하는 것, 또한 말한 사람도 상대에게 말의 주도권을 넘겨주는 것, 이것이 되면, 대화처럼 아름다운 것이 없다.
시간은 피자와 같다. 10명이 모였으면, 피자는 최소한 10조각으로 나눠야한다. 그처럼, 누군가 ‘말할 시간’을 분배해야한다. 분배의 방법이 ‘질문’이다. 퀴즈를 내서 맞추는 것보다, 각자의 의견을 표현하는 질문을 던지고, ‘말하는 시간의 기준’을 미리 설정해야한다. 시간은 피자와 같다. 누군가 시간의 피자를 많이 먹으면, 다른 사람은 먹지 못하게 된다. 토론문화에서 이것만 준수하면, 모든 대화는 즐겁다. (대화에서는 틀림은 없다. ‘다름의 자유’가 존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