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물은 예상 밖이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좋은 일이 생길 때, 하나님이 주셨다. 요한복음 3장 10절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이라고 했다. 분명,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또한 사마리아 여인이 하나님의 선물이다. 세례요한의 증거, 니고데모와 환담을 가졌으나 예수님은 빈손이었다. 다시 고향으로 낙향하는 예수님은 배가 고파서, ‘피곤하여 우물 곁에 앉으시니’라고 했다. 주저앉은 것이다. 세례만 계속 준다고 대책이 마련되는 것은 아니다. 엠마오로 낙향하듯 고향가는 길에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결혼을 6번 했군요, 지금 남편도 곧 헤어질 것 같은데….”라고 정곡을 찌르니, 사마리아 여인은 깜짝 놀라면서 “예배 장소”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잃어버린 양한마리를 얻듯이, 예수님을 알아보는 생명을 만났다. 그리고, 기생 라합이 여리고성 문을 열어주듯이, 사마리아 여인은 그 동네의 문을 열어줬다.
이 장면과 확실히 대비되는 곳이 있다. 마태복음 8장 가다라 지방 공동묘지 군대귀신 들린 자 전도 사건이다. 가다라 지방(거라사인)의 골칫거리는 바로 공동묘지에서 밤낮 부르짖는 군대귀신 들린 자였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풍랑속을 뚫고서 그곳에 도착해,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듯이 군대귀신을 완벽하게 해치웠다. 이제, 가다라 지방 귀족들이 달려나와서 감사인사를 해야하는데, 웬걸 “떠나소서”라고 했다. 군대귀신을 물리친다고 돼지떼 2천마리가 희생됐기 때문이다. 경제적 손실이 상당했다.
사마리아 여인을 전도한 것과 비교하면, 제자들의 생명이 위험했고, 돼지떼 2천마리가 희생당하면서, 예수님의 평판도 상당히 곤혹스러워졌는데, 예수님은 거라사인 귀신 들린 자에게도 이신칭의(以信稱義) 옷을 입히신다. 구원에는 귀천(貴賤)이 없다. 구원에는 경제(經濟)도 없다. 돼지떼 2천마리가 희생될 때도 있고, 말로 끝날 때도 있다. 말로 전도한 사마리아 여인은 동네 전체를 데려왔고, 돼지떼 2천마리를 희생한 군대귀신 들린 자는 혼자 겨우 살아남았다. 모두 주님의 사랑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향유옥합(3천만원)으로 장례를 예비한 베다니 마리아의 사랑이나, 예수님의 성전세 반세겔(5만원)을 대신 완납한 베드로의 사랑이나, 모두 아름다운 것이다. 누가 알랴!! 예루살렘 성전 대청소(요한복음 2장)을 한 것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기 위함일지…. 사람의 일은 알 수가 없다. 때론 얻는 것이 없어도, 때론 얻는 것이 넉넉해도, 씨뿌리는 일은 날마다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