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어의 상징체계를 가지고 있다. 언어는 곧 말과 글이다. 말은 현재적이고, 글은 영원성이다. 인류문명은 언어를 통해 그 지혜를 축적하고, 법(法)과 책(冊)과 종교(宗敎)를 만들면서, 영속성을 갖는다.
소통(疏通)은 “확 통하는 것”이다. 확실히 통하려면, 이쪽과 저쪽의 터널이 모두 뚫려야한다. 한쪽이 막히면, 그 터널은 막다른 골목이다. 의사소통은 최소한 2사람의 관계에서 ‘나눔과 분배’의 과정이다. 대상은 ‘의사’(意思) 곧 마음의 생각이다. 정보전달이다.
우리는 의사소통을 ‘정보전달’로만 인식한다. 의사소통은 정보전달이 아니다. 정보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정보가 이동하는 경로가 없다면, 정보는 의미가 없다. 정보를 교환하는 사람도 매우 중요하다. 의사소통에 있어서 이것을 간과하면 안된다.
2사람이 인간과 신으로 확장하면, ‘계시’(啓示)가 된다. 엘리야는 요단강에 숨었다. 어느날, 까마귀같은 우상숭배자가, 혹은 까마귀처럼 까맣게 옷을 입은 아랍인이 떡과 고기를 가져왔다. 비가 오지 않으니 기우제를 지낸 것이다. 그때, 엘리야는 그것을 “신의 계시”로 받았다. 왜냐면, 엘리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까마귀가 떡과 고기를 가져오리라”고 했다. 마치, 세례요한이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면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인물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다”고 계시를 받았듯, 그렇다. 까마귀와 비둘기가 상징의 언어로 매개체가 된 것이다. 이때 까마귀와 비둘기는 특별한 사람에게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이 신의 계시다. 신의 계시는 공개되는 비밀언어다.
의사소통을 잘하려면, 경청의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 ‘잘 듣기’에는 훈련이 필요하다. 상대의 말을 상대의 입장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인식의 편견은 모든 말을 자신의 언어로 인식하는 관성이 작용한다. 편견없는 자도 동일하다. 인식은 편견의 중력이 너무 강해서 그렇다. 블랙홀과 같다. 하나님이 계시를 하더라도, 사람은 심판의 계시를 축복으로 받는다. 로마서 1장에서 사도바울은 이것을 말한다.
[로마서 1장]
2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28.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왜 그들은 ‘악’(惡)을 행할까? 악(惡)을 선(善)으로, 죄(罪)를 의(義)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분명 양심과 진리와 상식을 통해서 불법과 불의와 거짓을 심판하겠다고 해도, 그들은 그것을 의로움으로 여기고, ‘권리와 자유와 정의’로 여긴다. 진리 대신에 ‘비진리’를 인식관에 두므로, 모든 것이 바뀐다.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으니, 아담과 하와의 인식관은 ‘선과 악’의 개념이 바뀐다. 인식관은 이렇게 무섭다.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이단의 세뇌교육은 북한의 우상사상보다 더 무섭다. (내가 말하는 이단은 십자가 복음을 벗어난 모든 거짓의 성경해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