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나는 20시간동안 드라마를 볼 때가 있다. 현재 시청하는 드라마는 매주 기다리는 맛이고, 종영한 드라마는 기다릴 필요없이 다운로드가 되니, 1회~20회를 계속 보다보면, 하루가 넘어간다. 그렇게 본 드라마가 간혹 있다. 달의 연인 보보심경 려는 매주 시청했던 드라마인데, 정말로 재밌게 봤었다. 역사 드라마를 현실과 접목해서,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드라마이다.
역사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성경은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이다. 성경은 역사의 범주속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구원을 주는 역사책이다. 역사(歷史)는 기록의 관점이 있어서 그렇다. 역사의 관점은 곧 ‘시대적 관점’을 말한다.
역사가는 반드시 2명이 있다. 하나는 과거에 존재하는 역사가, 다른 하나는 현재 존재하는 역사가이다. 우리는 과거에 존재하는 역사가는 쉽게 발견한다. 가령, 요한복음은 요한이 쓴 복음서로서 ‘요한’을 쉽게 발견한다. 그런데, 현재 존재하는 역사가도 있다. 바로 자신이다. 요한복음을 읽는 그 순간, 독자는 이미 역사가로 바뀐다. 그래서 역사는 곧 현재다. 현재적 역사가로서 자신은 과거와 소통한다. (역사란 무엇인가_에드워드 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요한복음 강해를 들었을 때, 관점의 이동에 대해서….. 30년전에 처음 30개론을 배웠을 때, 그때도 충격이 핵폭탄급이었다. 그곳을 떠난 후, 그때와는 전혀 다르게, ‘섬이 옮기듯’ ‘관점의 이동’을 경험했다. 계시록에 “섬이 옮긴다”는 표현이 있는데, 마치 좌표축이 이동하는 그런 성경해석을 배웠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4명의 여인에 대한 ‘요한복음 저자의 관점’에 대해, 설명을 해주시는 강의였는데, ‘성경의 오묘한 관점’을 그때 비로소 봤다. 토끼가 실눈을 뜨듯, 요한복음과 마태복음이 분명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구약과 신약이 또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관점의 분리는 내게 “과거 30년전에 믿은 성경해석은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다”고 깨닫게 했다. 마태가 본 관점의 예수님이 마태복음이고, 요한이 본 관점에서 예수님이 요한복음이고, 누가가 본 관점에서 예수님이 누가복음이고, 마가가 본 관점에서 예수님이 마가복음이고, 사도들이 본 성령의 역사를 ‘누가가 본 관점의 기록’이 바로 사도행전이다.
역사를 해석할 때는 2가지 관점을 인정해야한다. 하나는 과거 역사가의 관점, 다른 하나는 현재 역사가의 관점이다. 그런데, 잘못된 성경해석을 하는 자들은 과거 역사가의 관점을 통째로 잘라버린다. 뿌리를 절단하고, 필요한 부분만 가지 꺽듯이 가져와서 자신에게 연결한다. 이것은 접붙임도 아니다. 접붙임은 고염나무에서 접붙임의 가지가 열리는 것이다.
요한복음 3:16이 대표적이다. 누군가 이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예수’를 ‘교주의 이름’으로 대체한다. 과연, 이것이 옳은가? 올바른 인용인가? 생각해보라.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한 인용법에 의문을 품지 않고, 그냥 “아멘”한다. 내가 그러했다. 성경의 이러한 인용법은 잘못된 것이다. 요한의 관점을 함께 인용하면서, 그때 인용한 자는 자신의 현실에 적용해야 바람직하다.
나는 역사 드라마를 좋아한다. 역사 드라마를 보면, 노론과 소론과 남인이 나온다. 드라마에서는 노론을 ‘보수의 기득권층’으로 설정하고, 소론은 ‘진보의 야당’으로 설정한다. 드라마는 그렇게 설정되지만, 조선시대 그 당시에 노론과 소론은 그렇지 않다. 역사 드라마를 볼 때, 그것을 인지하고서 봐야한다.
역사 드라마에는 3가지 관점이 등장한다. 1)조선시대 역사 자체 2)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역사 사건 3)시청자가 보는 역사 사건이다. 역사 드라마는 마치 ‘성경해석’과 같다. 역사적 예수는 이미 존재했었고, 그 역사적 예수는 복음의 드라마를 통해서 나타났고, 그 드라마를 다시 성경해석하는 것이 ‘이단의 드라마’이다. 그 드라마에 열광하는 것도 좋지만, 시청자로서 성도는 “드라마가 과연 역사적 사실과 부합한가”에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한다. 이것이 현재적 역사가로서 책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