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은 처음부터 압권이다. 영락없이 야곱의 ‘라헬과 레아’를 연상케 하는 사연이 들어있다. 사랑을 받는 한나가 도리어 ‘레아의 한맺힘’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다. 그리고, 사무엘을 낳고, 하나님과 약속을 지켰다. 그 어떤 간절한 기도를 할 때는 하나님께 약속을 하고, 그것이 이뤄지면 사람은 하나님과 약속을 잊는다. 이것이 인간이다. 하나님은 컴퓨터와 같아서 잊지 않는다. 한나는 약속을 잊지 않고,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쳤다.
아이 사무엘이 성장할 때, “사무엘아”라고 부르니, 사무엘은 엘리에게 달려갔다. 3번을 그렇게 했다. 이 사건은 내게 큰 묵시를 준다. 엘리를 따르는 신앙이 있고, 하나님을 따르는 신앙이 있다. 엘리를 따르는 신앙은 결국 사람의 심부름을 할 뿐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명자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그 말씀을 인격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단이 잘못된 것은 여기에 있다. 엘리는 곧 교주이고, 사무엘은 성도와 같다. 성도가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게 해야한다. 만약, 하나님이 사무엘을 불렀을 때, 엘리는 그것을 알고서 “내 말만 들어라”고 했다면, 그것은 알고서 지은 죄에 해당된다. 엘리는 눈이 어두워졌으나, 하나님의 심판이 자신의 가족에 임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사무엘을 통해서도 재확인한다.
음흉한 마음을 가진 목사와 교주는 헤롯의 잔인한 칼로 ‘아이 사무엘’을 죽일 수도 있다. 이러한 일은 세상 단체나 정치에서도 비일비재하며, 인재를 죽여야 기득권이 유지되는 원리다. 다행히 사무엘은 엘리의 핍박을 받지 않았다. 엘리는 사무엘이 하나님을 찾는 방법을 쉽게 알려준 것을 알 수 있다.
[블레셋과 언약궤 사건]
블레셋과 전쟁에서 언약궤가 있었음에도 이스라엘이 패했다. 하나님의 약속이 왜 실현되지 않았을까? 게다가 언약궤를 뺏겼다. 그 뉴스를 듣고 엘리는 98세에 사망했다. 사사로 있는지 40년이다. 사사 제도는 요즘의 대통령제처럼 세습되지 않은 통치권이다. 옷니엘, 삼손, 기드온, 입다 등이 사사로 활동했다. 사무엘이 마지막 사사였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
– 사무엘상 4:4
이 사건은 ‘아간의 범죄’로 이해하면 쉽다. 난공불락 여리고성은 무기없이 7일만에 함락했다. 반면 아이처럼 작은 ‘아이성’ 전투는 참패를 당했다. 아간의 범죄 때문이다. 죄가 있으면, 언약궤는 내부를 겨냥한다. 언약궤 때문에 더욱 이스라엘은 패배했다. 언약궤는 전쟁의 승리를 담보하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이 실현됨을 말한다. 그날 전쟁에서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이 패배한 것으로 이뤄졌다. 그 비밀은 오직 2사람만 알았다. 사무엘과 엘리 제사장이며, 엘리 제사장은 알자마자 사망했다. 그리고, 읽는 독자도 그것을 알게 된다. 언약궤는 사람이 말씀을 실천하는 것임을…..
하나님의 언약궤는 신약에서 예수님과 성전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언약의 말씀이고, 성전은 국가의 언약궤이다. 둘은 짝이다. 언약궤속에 증거판의 말씀이 들어있다. 신약시대에는 말씀이 육신으로 걸어다니면서 사람들과 교제를 했다. 그리고, 유월절이나 안식일 때 언약궤에 해당하는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이 강론으로 나타나신다.
‘언약궤와 함께 있다’는 것은 공간으로 함께 있다는 것이며, 하나님은 ‘삶과 행위로서’ 함께 있기를 말씀하신다. 곧, 말씀의 준행이다. 언약궤를 소유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제자들중에 가룟 유다는 ‘배신자’로 자살했다. 함께 있었으나 그렇게 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교회 소속이다. 제사장들이 인정을 안했을 뿐, 예수님은 명절때마다 예루살렘에서 강론하고, 말씀을 백성들에게 알려주면서 말씀의 사람으로 살았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언약궤를 멘 책임자로서 강한 믿음으로 ‘이스라엘의 승리’를 예언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다. 홉니와 비느하스를 죽이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날의 전쟁을 예비했다. 언약궤를 철통같이 믿었던 엘리의 두 아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죽었다. 다윗의 편지를 철통같이 믿었던 우리야 장수는 다윗의 죄 때문에 죽었다. 언약궤는 곧 하나님의 편지와 같다. 사람의 편지와 하나님의 편지는 완전히 다르다.
다윗의 편지는 사람을 죽였고, 하나님의 편지인 언약궤는 범죄자를 죽였다. 해치(獬豸)처럼 그러했다. 해치는 전설의 동물로서 선악의 시비(是非)를 알고서 죄인을 찾아내서 물에 빠뜨려 죽게 하는 능력자로 알려져 있다. 죄의 냄새를 맡아서 찾아내는 능력을 가진 전설의 동물인데, 바로 언약궤를 상징한다. 다윗의 편지로 우리야 장수가 죽자, 나단 선지자가 해치처럼 나타나서 다윗의 죄를 목숨을 걸고 직언했다.
어제는 어제로 살아냈고, 오늘도 하나님께서 평안을 허락하시면 하루를 더 살아갈 것이다. 죽음은 인생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죽음을 망각한 자는 그림자없는 유령과 같다. 죽음을 삶의 곁에 두고 사는 것이 인생의 아름다운 걸음이다. 옛날 중세는 교회옆에 공동묘지가 있었다고 한다. 성경책 표지가 검정색인 것은 죽음을 심판하는 책이어서 그렇다. 그림자가 있는 자마다 사람일지니…… 그림자는 곧 죽음의 상징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