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색깔이 없는 사람은 자기 얼굴이 없는 사람과 같다. 얼굴없는 사람은 가면을 쓰는 사람이거나 머리없이 사는 사람이다. ‘얼굴’은 곧 실명이며, 진정성이며, 늘 변하지 않는 자기자신이다. 이름이 자신을 나타내듯 얼굴도 자신을 나타낸다.
언론인은 직업을 탐색하는 직업이어서 다양한 방면에 지식을 갖게 된다. 어찌보면 이것저것 잡동사니처럼 많이 알게되는 것이 언론인이다. MERS에 대해서도 의학전문지식을 접하다보니, 어설프게 전문가 흉내를 낸다. 앵무새처럼!!! 처음엔 내가 다양한 전문지식을 많이 알기 때문에 그 분야에 재주가 있다는 착각도 든다. 그러나 그건 신기루일 뿐이다.
언론인은 다른 직업들을 알아가는 취재기자일 뿐, 해당전문가는 결코 아니다. 그래서 언론사는 전문인을 ‘취재기자’로 활용하는 방법을 찾기도 한다. 해당 전문가를 취재기자로 활용하면 아무래도 ‘전문용어’에 있어서 깊이있는 지식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전문가가 취재기자로 활동하므로, 각 분야 전문인들은 보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돌아보면, 나는 한문과 영상제작과 편집기술과 사진촬영과 글쓰기, 소셜 네트워크에 대한 정보들을 취합해서 그럭저럭 살아왔던 것 같다. 때론 내가 그 분야 전문가라고 자부하기도 하면서 나름대로 자신감있게 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낮은 데로 임하소서’인 것 같다.
사진촬영에서도 사진가가 낮아지지 않고서는 상대방은 결코 높아지지 못한다. 내가 높아지면 상대방은 낮아지게 되니, 나는 자주 무릎을 꿇고서 상대방을 높이는 사진촬영을 진행한다. 낮아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삶의 지혜인지, 새삼 느낀다.
내 인생가운데 돌아보면, 나를 높여주었던 몇몇 사람들이 손가락에 꼽히는데 그 분들의 고귀함과 인격의 고매함에 나는 고개가 숙여진다. 예전에는 그러한 칭찬이 그저 ‘나의 잘남’으로 감정의 술취함으로 흘렀다면, 지금은 나를 높이는 그 분들의 낮아짐에 대한 인격을 바라보게 된다. 내가 높아질 이유가 없는데 높아진 것은 그 분들의 낮아짐의 높은 인격덕분이었다.
교만(驕慢)은 ‘높이 탄 말’, 혹은 ‘말위에 탄 벼슬’의 의미이다. 장원급제를 하게 되면 말을 타게 된다. 말은 언제나 권력과 으뜸과 다스림의 상징이다. ‘말’을 탈 때는 매우 주의할 것이 있다. 바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말을 타자마자 ‘고삐’를 붙들어야한다. 나는 말을 잘 탄다고 스스로 과신하다가는 말에서 떨어져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교만은 늘 위험한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것은 곧 말을 타고서 고삐를 잡지 않은 것과 같다.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과 같이 가야한다’고 내 인생의 멘토가 늘 나에게 조언한다. 나는 얼마나 내 주변인들에 대해서 가치를 알고 있는가, 꼼꼼히 점검하고 살펴보고 ‘거울속 얼굴’을 관찰하듯이 알아본다. 내가 주변인의 가치를 모르는데, 주변인의 나의 가치를 알 턱이 없다. 가치없는 곳에 가게 되면 무가치한 대접을 받기 일쑤다.
새벽을 열면서, 다시 한번 ‘신(信)’과 ‘유(誘)’의 엄격한 차이점을 인식하였다. 신뢰성은 信이고, 유혹은 ‘誘’이다. 말을 잘하는 것은 남을 속이는 것이며, 사람과 소셜을 일으키는 것은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책임성’을 지는 것이다. 그저 수수하게, 그저 평범하게 ‘신(信)’을 지키면서 살아가자. 이러한 이유로 서울교육방송의 편집위원회 및 방송교수진을 진정성있게 활동하는 사람 중심으로 재개편하고, ‘가지치기’를 단행해야겠다.
※ 고향에서 참다래 농장을 경영하는 나의 동생은 여름마다 ‘다래솎기’를 단행한다. 다래가 너무 많이 열리면 가을철에 다래열매가 크지 않아서 필요한 다래열매만 남기고 나머지는 손으로 따버린다. 선택과 집중이 다래나무에도 적용되는 것. 삶의 지혜는 ‘필요한 일에 필요한 시간을 쓰기’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