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서 파생된 각종 종교들이 많고, 기독교는 깊은 잠을 자면서도 모른다. 나는 한때 이단의 교리에 심취했다. 마약중독에서 벗어난 요즘 내가 속했던 그 교리를 요즘 깊게 감찰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보이스 피싱을 판별하듯, 사람은 진리와 비진리를 분별해야한다. 이 사건은 창세기 3장부터 시작됐다. 더 근원적으로 창세기 1장 2절부터 시작됐다. 그때 땅은 공허했고, 흑암은 깊음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위로 운행하셨다. 그때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 그리고 빛과 어둠을 나누었다. 그처럼 ‘진리와 비진리’를 나누는 것이다.
진리는 무엇인가? 성경이 곧 진리다. 아멘!! 그렇다면, 성경의 무엇이 진리인가? 이러한 질문은 본질을 공략한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와를 유혹했고, 하와도 남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속였다. 에덴동산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두 범죄했다. 정확히 표현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살짝 첨가된 ‘뱀의 말’로 범죄했다. 그러나, 사람이 볼 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인다. 뱀이 만약 왕이거나, 목사이거나, 사도이거나, 교황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을 거론하자, 베드로가 막았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십자가를 반대한 베드로는 인사탄이다. 이 시대에 십자가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 십자가는 실패한 사역이라고 해석하는 자들이 있다. 베드로처럼 사탄의 생각이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왜 십자가를 반대할까?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를 반대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 시대는 이 시대의 진리가 필요하며,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때의 일이다”라고 해석한다. 이정도 설명앞에 무엇을 말하랴. 진리는 결국 논증이 아니다. 진리는 진리로 분별하는 것이다. 진리의 원본은 오직 성경이며, 예수님의 사역이다. 예수님의 사명과 사역에 대해 100% 완벽하다는 기준점은 변경될 수 없다. 왜냐면, 예수님은 생명나무이며, 구약의 완성자이다.
구원이 무엇인가? 왜 예수님이 구원주인가? 왜 모세가 구원주인가? 모세를 구원주로 말하면 거북한 사람도 있는가? 성경은 모세를 구원주로 기록한다. 모세도 구원주이고, 예수님도 구원주이다. 대한민국은 1945년 해방됐다. 해방은 풀려남이고, 구원받은 날이다. 누구로부터 해방이고, 구원인가? 일본이다. 1895년 독립문을 세운 것은 청나라부터 해방이고, 1945년은 일본으로부터 해방이다. 독립문은 일본의 압제와 아무 상관없다. 영은문(迎恩門)은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굴욕의 연회장이었고, 그곳을 철거하고 독립문을 세운 것이다. 독립을 말하면, 누구로부터 독립인지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 구원도 마찬가지다.
중풍병자가 침대에 눕혀 예수님께 왔다. 소방대원처럼 4명이 들 것에 들어서 중풍병자를 데려왔다. 그때 예수님은 “침대를 들고 일어나 가라”고 했다. 그 중풍병자에게 예수님은 구원주다. 무엇으로부터 구원인가? 1)죄(罪) 2)병(病)이다. 바알의 신녀로 살던 고멜이 퇴물이 되어 ‘매물’로 나왔다. 이혼도장을 찍은지 오래된 호세아에게 하나님이 임하여, “가서 데려와 살아라”고 했다. 자녀가 3명인데, 둘째와 셋째는 고멜이 낳은 다른 남자의 자녀들이었다. 호세아로서는 바람핀 아내의 뒤처리나 해야할 한심한 신세였으나, 가서 값을 지불하고 데려와 살았다. 고멜에게 호세아가 구원주이다. 그렇다면, 고멜은 누구로부터 자유인가?
이단의 교리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심오한 것이 종-아들-신부의 교리다. 대부분 이 논리에 현혹당한다. 이보다 완벽할 수 없으니, 넘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종은 무엇이고, 아들은 무엇인가? 그것을 논해야한다. 나는 그것을 감찰한다. 무작정 믿으면, 에덴동산을 모두 뺏긴 하와가 될 수 있다. 속지 말자.
구약이 종이었나? ‘종’이라고 말할 때, 매우 포괄적이다. 이집트에 있던 그 시절엔 종이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는 지배자가 되었다. 다윗시대에는 왕들이 출현했고, 주변 국가에서 조공까지 드렸다. 이단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설명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벗으로 불렀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신부’로 불렀다.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은 당신을 “남편”으로 호칭하면서, “내가 너희에게 장가를 들리라”고 하셨다. 성경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는데, 우리는 “구약은 종급”으로 오해했다. 하나님은 전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다. 속지 말라. 내가 말한 것이 성경적 진리에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최소한 ‘구약은 종급이다’는 말이 성경에서 어긋난다는 그 말은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종-아들-신부의 교리에서 무엇이 문제인가? 먼저, 구약에서 신약이 독립했다는 도표도 모호하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나왔다. 그때 이집트가 멸망했는가? 훗날 남유다가 멸망했어도 이집트는 번성했다. 독립했어도 기존은 그대로 남아있다. 구약에서 신약이 나온 것은 맞지만, 구약은 여전히 존재한다. 구약에서 신약이 나왔다는 도표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구약은 율법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파괴하고, 새로운 약속을 선포한 것이 전혀 아니다. 예수님이 모세를 대항해서 싸움으로 모세에게 속한 백성을 꺼내서 아들로 삼은 것이 아니다. 구약-신약의 프레임은 이집트-출애굽의 프레임이 된다. 예수님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제2의 모세가 되어서 예수님이 행하신 것은 그 시대 권력과 마귀를 대항한 것이다.
모세는 바로왕과 대항해서 노예생활을 하는 백성을 꺼냈다.
예수님은 마귀와 대항해서 죄의 노예가 된 백성을 꺼냈다.
그렇다면, 이 시대는 누구와 대항해서 싸워야하는가?
구약-신약-성약
종-아들-신부
모세-예수-재림주
이러한 설정은 매우 위험하다. 정말로 위험하다. 비진리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존을 무너뜨리면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속으면 안된다. 모세는 이집트의 바로왕과 대항했고, 예수님은 이 땅의 마귀와 대항했다. 예수님이 모세와 싸운 것이 절대로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다. 구약에도 하나님을 거룩하게 불렀으나, 아버지로 부른 경우도 있었다. 하나님은 당신을 남편으로 호칭하기도 했다. 호세아에게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예수님을 참람하다고 한 것은 ‘친아버지처럼’ 친밀하게 불러서 그런 것이다. 회장 아들처럼, “내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로서 말씀하신 것이다. 호적상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당신을 믿은 자들에게 그렇게 부르도록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마다 장의자를 쳐다보며, 하나님의 가족을 영접해야한다. 교회는 아버지의 집이다.
신부는 곧 하나님을 사랑으로 영접한 신앙이다. 예수님이 그것도 허락했다. 열처녀 비유에 나온다. 그 비유는 재림의 비유가 아니다. 누구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렇게 살도록 허락하셨다. 요한복음 15장에 “내가 너안에, 너가 내안에” 거한다는 것이 바로 부부일체를 뜻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사랑으로 영접하여 그 신부가 된 자마다 장의자를 쳐다볼 때 모두 예수님의 신부들이다. 어찌 대해야하는가? 혹자는 “내가 하나님의 신부다”고 한다. 그러한 자마다 장의자를 내려다보면, 모두 하나님의 신부들이다. 어찌 대해야하는가? 하나님은 그것을 지금도 물으신다.
모세는 구원주다.
예수님도 구원주다.
모세는 이집트에 붙잡힌 백성을 구원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붙잡힌 백성을 구원했다.
누군가 구원주라고 하면, 누구로부터 구원을 시켰는지 물어야한다. 아들에서 신부로 구원을 시켰다고 하면, 믿지 말라. 예수님은 모세에게 붙잡힌 백성을 구원시킨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붙잡힌 백성을 구원시킨 것이다. 아들에서 신부로 구원시키는 것은 비진리다. 모세에게 속한 자들은 모세의 구원을 받을 것이고, 예수님께 속한 자들은 예수님의 구원을 받을 것인데, 그 누가 스스로 구원주라고 하면 그가 어떤 구원의 약속을 받았는지 반드시 확인해야한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붙잡힌 우리 영혼을 하나님께 돌려주신 구원주이다.
구약성서를 깊게 읽어보면, 마귀에게 붙잡히지 않고, 하나님을 남편으로 모시고 살면, 그것이 하나님의 신부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살면 된다. 중요한 것은 마귀로부터 해방이다. 예수님이 아니면, 누구도 마귀로부터 해방을 받을 수가 없다. 이것이 곧 십자가 구원의 가장 깊은 비밀이다. 십자가를 버리면, 마귀에게 붙잡힌다. 절대 불변의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