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마늘과 김치’ 계란 후라이에 저녁을 먹었다. 계란을 3개 풀고, 마늘 빻은 것을 뿌리고, 소금을 살짝, 김치를 썰어서 올리면, 맛있는 마늘 김치 계란 말이가 요리된다. 계란을 먹을 때마다, 나는 졸탁동시(啐啄同時) 사자성어를 생각한다. ‘啐’은 병아리가 안에서 쪼는 것, ‘啄’은 어미 닭이 밖에서 쪼는 것이다. 어미 닭은 병아리의 소리를 알아듣고 밖에서 함께 도와준다. 그런데, 계란 후라이는 밖에서 그냥 깨는 것이다.
‘낑낑’ 거리면서, 수학문제를 풀려고 헤매면서, 학생은 수학의 탐구능력이 향상된다. 그런데, 답안지를 베껴서 100점을 맞는 학생은 점수만 높고, 수학적 사고력을 배양받지 못한다. 학생을 진심으로 위한다면 졸탁동시(啐啄同時)해야한다. 학생 스스로 하게 하는 것이다.
기독교로 복귀한지 5개월에 접어들면서, 내게 엄청난 대반전의 역사가 일어난 것은 없다. 여전히 나는 고단하고, 여전히 나는 책들과 씨름하고, 여전히 나는 언론적 탐구정신으로 다양한 사건을 취재하고, 여전히 나는 고뇌한다. 달라진 것은 책들의 성격이다. 성경책은 날마다 가지고 다니고, 몇권의 신앙서적과 언론활동에 필요한 책들을 가지고 하루를 살아낸다. 또한, 내 지성과 영성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 일어났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다. 왜 따먹었을까? 성경학자들이 다양하게 말들하고, 나는 옛날 교회에 속했을 때, 아주 강열한 성경해석을 들었고, 그 해석은 너무 강해서 그 어떤 것도 침입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탁월한 해석이다. 그런데, ‘왜 선악지식의 나무의 열매’라고 불렀을까? 이런 의문에 그곳의 사람들은 마땅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배우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말씀이 내 삶이 되는 것임을 알게 됐다. 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십자가를 지고서 나를 따르라”고 했을까? 생활속에서 말씀을 살라고 하신 것이다. 내가 십자가를 높이 들고, 술집에서 술잔을 즐긴다면, 술잔을 높이 들고서 복음의 설교를 외친다면, 가장 논리적인 말들로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고, ‘건배’를 외친다면, 나는 뱀이다. 무서운 일이다. 하나님의 지식을 내가 탐구하고, 그 지식을 삶으로 살아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인생을 살아보니, 돈을 버는 사람들은 마약처럼 ‘돈을 벌게 해줄게’라고 유혹해서, 거기에 걸려들면 그것을 모아서 돈을 버는 것 같다. 일확천금을 벌 것 같은 로또는 없다. 뱀이 그랬다. 로또에 당첨시켜줄 것처럼, 엄청난 흥분을 줄 것처럼, 뱀이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고 했다. 여자는 거기에 속아 넘어갔다. 보이스 피싱 당한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으면, 때가 되어서 선악을 분별할 수 있었을 것인데, 어린 나이에 어리석게 행동한 것이다.
48세, 청춘의 때에 분별하지 못함으로 결혼했고, 분별하지 못함으로 이혼했고, 분별하지 못함으로 이단에 빠졌고, 분별하지 못함으로 십자가를 버렸다. 머리색이 하얗게 변색되는 중년의 나이에,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미련스럽게 행동하고 판단했던 일들이 자꾸 떠오른다. 많이 떠오른다. 그러한 경험을 뼈로 삼고, 슬픔의 고난을 살로 삼아, 하나님은 나를 새롭게 창조하심을 오늘 비로소 믿어본다. 그래도, 지난 과거의 과오는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창세기 3장 6절에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고 했다. 금융다단계로 ‘가상화폐 투자 사기단’이 꼭 이렇게 한다. 그들의 설명을 들어보면, 그들의 눈으로 볼 때 돈이 보인다. 그렇게 돈을 투자하면, 몽땅 사라진다. 투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영혼의 구원문제에 함부로 투자하는 것이 아니다. 깊은 영성과 경륜과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이뤄야한다. 성경외에 구원을 주는 책이 없고, 십자가 외에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없으며, 예수님 외에 구원을 주는 이름을 인류가운데 준 적이 없다. 오직 성경, 오직 예수님, 오직 십자가이다.
계란 후라이 먹으면서, 내 영혼과 지성과 영성이 졸탁동시로 태어나길, 성령께서 나를 일으켜 세우시길, 기도하였다.
* 啐(쪼을 졸) 卒(끝까지) 쪼는 것
* 啄(쪼을 탁) 멧돼지(豕)가 흙을 파듯 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