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에 검색하면, 내가 쓴 ‘엘리야와 까마귀밥’의 전자책이 있다. 내가 이단에 있었을 때 집필한 성경 수필집이다. 그곳을 나와, 과거의 교리를 꺼내서 다시 쓴다. 교리(敎理)는 ‘교육하는 진리’이며, 나는 배운 그때의 교리를 ‘진리인지, 비진리인지’ 팓단할 책무가 있다. 그러므로, 성경적 의견을 제시함으로 그때 교리를 비판한다.
성경은 텍스트를 원문 그대로 살리면서 풀어야한다. 환골탈태와 같다. 부모가 자식을 낳을 때, DNA가 그대로 유전된다. 원문의 본질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해석되어야, 진리가 손상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고향 교회에서 초청 부흥집회를 하시면서, 이사야서 61장을 본문으로 사명선포식을 하셨는데, 이사야서 61장의 핵심인 첫문장을 그대로 인용하시면서 과감한 편집과 수정과 삭제를 하시면서 성령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수정과 편집은 가능해도, 원문의 근본이 훼손되면 안된다. 원문을 훼손할 경우, 그 책임이 따른다.
가령, 예수님도 이사야서 61장을 인용하시면서, 갈릴리 교회 성도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이사야 61장 예언에서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빼면서, 엄청난 분쟁이 발생했다. 이방민족에 대한 재앙과 심판은 곧 로마제국의 심판이며, 무장독립투쟁을 말한다. 예수님은 그것을(무장독립) 거부했다. 그리고 책임이 따랐다. 예수님도 그러한데, 하물며 인생이랴!!
30개론(20개론)에서 “그릿 시냇가는 바알신과 아세라신 같은 우상을 가장 잘 숭배하던 지역”이고 “엘리야가 매일 먹은 떡과 고기는 사실 신비한 기적의 떡과 고기가 아니라 미신 섬기는 사람들이 놓고 간 엘리야가 차마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이자, 눈물겨운 설움의 떡 그리고 슬픔이 녹아있는 고깃덩이였다.”라고 해석한다. 얼핏 듣기엔 그럴 듯하다. 사실은 정반대다. 부분만 맞고, 전체는 틀린 성경해석이다. 성경은 깊은 맥락으로 큰 그림을 봐야한다.
이번 단원에서는 ‘엘리야의 먹거리’로서 ①까마귀들의 떡과 고기 ②사르밧 과부의 인절미를 다루고자 한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하나님이 남편이어서 그렇다. 과연, 엘리야가 아합왕을 상대로, 그들의 떡과 고기와 벼슬과 명예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서 참된 순교의 길을 걸었는데, 그 생존권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지 않으실까? 구원의 길은 하나님이 준비하신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바칠 때, 이미 ‘숫양’을 별도로 준비하셨다. 우상숭배로 들끓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가나안 땅의 거처를 주셨다.
그처럼, 하나님은 아합정권과 정면승부를 한 엘리야에게 새로운 은신처로 그릿 시냇가를 주셨다. 이곳은 요단강 동편지역으로 이방민족이 살던 곳이며, 아합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자, 골리앗의 고향인 가드에서 숨어 지냈던 다윗처럼 엘리야도 그릿 시냇가로 피신했다.
①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②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③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④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①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②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③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④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⑤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그릿 시냇가에서 만난 까마귀들과 사르밧에서 만난 과부는 서로 닮은 꼴이다. 5개 문장으로 구분하면, 각 문장마다 연결해서 기록되었다. 까마귀들은 곧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일까?
까마귀들 : 사르밧 과부
떡과 고기 : 떡과 기름
요단동쪽 : 시돈땅
그릿 시냇물 : 물 조금
까마귀를 명령하여 : 과부를 명령하여
먹이게 하리라 : 음식을 주게 하리라(공궤)
30개론은 엘리야가 제사음식을 먹었고, 바알의 우상음식을 먹었다고 해석한다. ‘아침과 저녁’ ‘떡과 고기’가 제사음식이니, ‘부정한 동물’로서 ‘까마귀’는 죽음을 상징하는 이방민족이니, 그렇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엘리야는 까마귀들의 대접을 받았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떡을 뺏어 먹지 않았고, 훔쳐 먹지도 않았다. 마지막 음식을 엘리야가 대신 먹음으로, 사르밧 과부에게 새로운 떡과 기름을 선물한 것이다.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날 먹었으나” (열왕기상 17:15)
마지막 음식으로 인절미를 맛있게 만들어서 엘리야를 극진히 대접한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와 식구가 함께 생계를 해결할 대책을 마련했다. 이와 같이 이러하다. 사르밧 과부가 그러하면, 까마귀들도 그러하다. 사르밧은 우상숭배의 본부였고, 핵심지였다.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서 이방민족 백성을 상대했고, 그들의 공궤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교활동’을 했다. 이후, 우상숭배의 핵심지인 사르밧으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이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집에서 함께 숙식하듯, 엘리야는 까마귀들과 함께 숙식하면서 살았다. 말년에 광야길로 피신한 다윗이 바르실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듯, 그렇게 한 것이다.
[사무엘하 19:32] 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가 팔십 세라 그는 큰 부자이므로 (다윗)왕이 마하나임에 머물 때에 그가 왕을 공궤하였더라. 왕이 바르실래에게 이르되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시돈땅 사르밧에서 엘리야가 구차하게 산 것이 아니다. 거지처럼 노숙자 생활을 한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당당히 전하면서 선교활동을 통해서 생존문제를 해결했다. 바알신이 우글거리는 시돈땅에서도 그렇게 살면서 생존문제를 해결한 엘리야인데, 그릿 시냇가 지역사회에서도 마을선교를 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다. 사르밧 과부에게 명령해서, 엘리야를 먹게 하리라고 했고, 실제로 사르밧 과부가 숙식을 제공하면서 함께 살았다. 까마귀들도 엘리야를 먹게 하고, 숙소를 제공하면서 함께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엘리야를 노숙자처럼, 제사음식을 훔쳐먹는 까마귀처럼 취급하면 절대로 안된다. 바알신을 배척한 엘리야가 몰래 바알음식을 먹었다는 어이없는 성경해석은 어리석음 자체다.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 말씀은 창조력이 있어서 이방민족의 사람들도 새로운 사람들로 만든다.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신다고 했다. 마태복음 4장에서도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이기니, 천사들이 예수님의 수종을 들었다. 아합왕을 배척하니,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해서, 까마귀같은 이방민족의 백성이지만, 새롭게 하심으로 엘리야를 먹이게 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