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있는 교회가 옳은가? 힘없는 교회가 옳은가?
약한 교회와 강한 교회!! 우리는 무엇을 지향해야할까?
쉽게 말해서, 돈많은 교회가 좋은가? 돈없는 교회가 좋은가?
세상정치를 통제하는 종교가 좋은가? 세상에 짓밟히는 종교가 좋은가?
대접하는 종교가 좋은가? 대접받는 종교가 좋은가? 대접하는 종교는 부유하고, 대접받는 종교는 지원받는 종교로 약하다. ‘대접받음’을 정치권력으로 생각해서 그렇지, 사회적 빈민층은 정부의 도움으로 살아간다. 그들은 정말로 구원의 섬김을 받아야 살 수 있다. 섬김을 받는 자들에는 ①정치 권력자 ②사회 약자의 두 부류가 있다. 즉, 사회에서 강자와 약자는 모두 섬김의 대상이다.
강한 교회, 약한 교회, 그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이 항상 머물수 있도록 해야한다. 만약 돈이 풍부하게 넘치면, 그때는 돈을 베풀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한다. 더불어, 돈이 부족하면 약한 교회로서 섬김을 받는 통로를 마련해야한다. 경제적으로 가난해서 도움받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경제적으로 부유해서 베풀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신앙 공동체는 경제적으로도 서로 융통하면서 ‘나눔과 베품’을 할 수 있어야한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요한 4: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한 4:10)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수’만 생각하고, ‘예수님의 갈증’은 간혹 간과한다. 예수님은 몹시 목이 말랐다. 그래서 “물을 좀 달라”고 요구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성전세 5만원의 독촉장을 받았다. (마태 17:24) 예루살렘에서 강론을 마치시고 다음날 새벽에 몹시 시장하셨다. 그때 무화과 열매를 먹고 싶었는데, 열매없는 나무였다.
[마태복음 21장]
18.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예수님은 목이 말랐고, 사마리아 여인은 영적으로 목이 말랐다. 예수님은 진리를 원하는 성도가 목말랐고, 사마리아는 종교적 갈증을 해결해줄 메시야가 목말랐다. 우물은 하나다. 야곱의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길러내고, 예수님은 말씀을 길러낸다. 교회 공동체는 서로 상호보완적으로 약함과 강함이 연결되는 공동체가 되어야한다.
약한 자는 강한 자를 통해 도움을 받고, 그 강한 자에게 있는 약한 것은 ‘약한 자의 강한 것’으로 도움을 받는다. 거지 나사로는 경제적으로 약했으나, 믿음으로 강했다. 자색옷 부자는 경제적으로 강했으나 믿음으로 약했다. 부자가 문을 열었어야한다. 거지 나사로는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다. 자신의 경제적 약함을 인정한 것이다. 부자도 자신의 신앙적 약함을 거지 나사로에게 인정했어야한다. 그렇게 상호 보완적 관계로서 부자와 거지가 하나가 되면, 경계의 대문이 열리고, 부자는 ‘거지의 대문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 부자가 잠근 대문속에 부자가 영적으로 갇혔다.
부자가 약한 거지 나사로를 도울 때, 사마리아 여인이 목마른 예수님을 도울 때, 영적인 생수를 공급받는다. 사마리아 여인이 마을로 예수님을 초대할 때, 마을은 예수님의 나라로 초대받는다. 이것이 상호 보완적 신앙 공동체이다. 약함과 강함은 모두 필요하다. 모두 강하면, ‘강강’의 전쟁이 일어난다. 강함과 약함의 조화, 인자의 권력은 낮아짐으로 섬김에 있다. ‘낮아짐’은 ‘약함’에 처하는 것이다.
타락과 희락은 한끝 차이다. 타락(墮落)과 희락(喜樂)은 한문으로 뜻이 전혀 다르지만, 희락의 동산에서 타락이 일어났다. 樂落(락락)은 말의 유희가 아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쁜 것이 ‘樂’이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추락한 것이 ‘落’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추락한 그것이 사람이 보기에 기쁨이 있다면, 그것을 무엇으로 불러야하는가? 약함과 강함은 결국 하나님이 보시기에 구원의 증표가 된다. 약함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놓이고, 강함은 구원을 베풀 수 있는 위치에 놓인다. 약한 자는 하나님이 보내는 구원의 손길을 받고, 강한 자는 하나님이 쓰시는 보냄을 받는다. 약하든 강하든 결국 하나님앞에 놓인다.
최초 부활은 언제 일어났는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최초 부활은 십자가 사건이후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시간은 유월절 다음날 새벽이다. 그때 예수님은 무덤속에서 부활했다. 그 다음에 누가 부활했을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추적해보자.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마태복음 28: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마가 16:8)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누가 24: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요 20:1)
마가복음 16장에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고 했다. 이들이 무덤속에 최초로 들어갔다가 나온 여자들이고, 그 다음은 베드로와 요한과 제자들이다. 3일후, 여자 제자들과 남자 제자들이 차례로 무덤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영적 부활’의 출애굽이 일어난 것이다. 지금 있는 곳이 무덤같은가? 주님께로 벗어나면, 그것이 부활의 탈출이다. 이집트를 축소하면, 무덤이다. 무덤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제자들처럼, 모든 성도는 생활속에서 크고 작은 무덤들을 경험하면서 살아간다. 모든 무덤은 부활로 나아가는 ‘통로’이다. 약함의 무덤속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