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책은 ‘말씀’이다. 성경속에는 다양한 사건, 사람, 비유가 존재한다. 예수님은 ‘이사야서 61장’을 고향 나사렛 교회에 초청 부흥집회를 하시면서,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라고 말씀했다. 낭독하신 말씀은 아래와 같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누가 4:18~19)
예수님은 성경말씀을 현실에 그대로 적용했다. 말씀과 현실을 분리하지 않으셨다. 현실의 사건을 말씀으로 적용해서, 파악하신 것이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는 말씀이 바로 그렇다. 그렇다면, 이사야서 61장에 등장하는 사람과 내용을 파악해서, 어떻게 적용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어야한다. 현실이 곧 무대가 되었고, 악인과 선인이 등장하며, 현실의 배경과 소품들이 있다. 성경속 역사적 배경과 현실은 무대가 분명 다르고, 인물도 다르다. 그러나, 말씀이 현실에 그대로 적용된다. 마치 “엘리야가 곧 세례요한이다”라고 하는 순간, 변화된 배경과 사건들을 대비해서 파악하는 성경적 상상력을 가져야한다.
①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 =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② 가난한 자 = 포로된 자 = 눈 먼 자 = 눌린 자
③ 복음 = 자유 = 보게함 = 은혜의 해
그 맥락이 서로 연결됨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이사야서 61장 예언이 나사렛 교회에 그대로 적용됐다라고 선포했다. 선포한 그 순간, 말씀이 적용된다. 즉, 말씀이 창조를 시작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래서 위대하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 그처럼 하나님의 사람이 말씀을 하면 그 말씀이 창조를 한다. 또한, 하나님의 사람이 움직이면, 그 행위가 곧 말씀이 되어서 그 사건이 변화한다. ‘하나님의 사람’이 열쇠가 되어서, 감옥에 갇힌 사건을 풀어주는 것이다. 말씀의 창조력이다. 예수님은 실제로 그렇게 행하셨다. 12년 혈루증 걸린 여자가 예수님의 옷을 만진 그 순간, 혈루증의 근원이 막히면서 피가 멈췄다. 꽃다운 청춘 12살 소녀가 죽었을 때, 예수님이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고 하고 손을 잡으니, 소녀가 일어났다. “빛이 있으라고 하니 빛이 생기듯” 소녀의 혼이 다시 돌아와서 소녀의 몸을 일으킨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가 창조력을 발휘한다. 빛이 가면 어둠이 물러가면서 문제가 해결된다.
성경은 매우 깊게 자세히 파악해야한다. 그래야 성경속 인물구도가 파악되고, 사건과 맥락이 이해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뱀의 말이 구분된다. 성경속에는 빛과 어둠이 정면으로 배치되는데, 이것은 자세히 봐야 보인다. 대충 보면 구분되지 않는다. 나사렛 교회에서 예수님의 말씀 선포식은 이러한 맥락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예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를 직접 비유를 들어서 말씀했다. 이사야서 61장 예언이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서 이뤄진 것을 ‘사례’로 언급하신 것이다.
예수님=엘리야=엘리사
포로된 자=사르밧 과부=나아만 장군
누가복음 3장에는 ▲세례요한의 세례 ▲ 예수님의 족보가 나온다.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고서 성령이 비둘기처럼 예수님께 임했고, 그 사건을 기점으로 예수님은 구약의 족보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서, 아담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았다. 즉, 구약의 원점까지 올라가서 아담의 자리에서 마귀를 만난 것이다. 현실의 장소는 ‘유대광야’이고, 에덴동산이 재현된 것이다. 3대 시험을 모두 이겼다. 구약에 등장하는 모든 시험들이 3가지로 압축됐고, 완벽히 이기신 것이다. 그리고, 유대광야에서 갈릴리로 가셨다가 백성들을 치유하시며 복음을 전하시다가, 고향 나사렛에 초청강연회를 가신 것이다. 곧, 태어나신 고향에서 출발점을 삼으신 것이다. 그 사건이 바로 누가복음 4장이다.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누가 4:28~30)
현실에서는 예수님이 교회에서 추방당했다. 그러나, 고향에서 예수님은 억압받는 약자였다. 묶였던 포로에서 출애굽이 일어난 것이다. 성경이 이렇게 응한 것이다. 이후에 나사렛 고향에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서서히 회개를 시작했고,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참회했다. 사르밧 과부처럼 마리아가 복음으로 돌아온 것이다. ‘율법에 종속된 마리아’가 ‘진리의 복음’으로 영혼이 자유됨을 얻은 것이다.
고향에서 추방당한 것은 엘리야가 수도 사마리아에서 추방당해 요단강 동편 그릿 시냇가에 숨은 것과 같다. 예수님은 갈릴리 근처 가버나움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 제자들이 살았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르밧 과부’가 된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는 “복음을 받는 자가 가난한 자이다”는 의미다. 누구나 복음의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자만 받는다. 가난한 자는 누구인가? 포로된 자이고, 못 보는 자이고, 눌려서 사는 자이다. 포로로 살면서 미래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회적 약자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간절히 갈망하는 자가 곧 가난한 자이다. ‘가난한 자’는 경제적 사회적 가난이 절대 아니다. 사회적 약자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건히 믿는 자를 뜻한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한다. 복음을 받는 자가 곧 가난한 자이다. 평소 하나님의 말씀앞에 진실로 사는 자에게 복음이 전달된다. 예수님이 평소 하나님의 말씀을 경건하게 대하면서 살았고, 그러한 삶속에서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한 것이다.
나아만 장군은 이방민족의 장군이다. 이스라엘은 당시 무장독립을 원했다. 바라바는 김좌진 장군처럼 독립군의 암살자였다. 독립투사다. 그러한 인물은 민족의 영웅이지만, 예수님의 복음을 믿지 않았다. 마치, 이스라엘의 왕은 엘리사를 믿지 않았는데, 오히려 이스라엘 왕이 두려워하는 적국의 국방부 장관이 엘리사를 믿고, 문둥병이 고침을 받았다. 아람 국가에서 요단강까지 와서 엘리사의 치료법을 따름으로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셨다.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을 오게 했고, 요단강으로 보냈다. 7번 요단강물에 씻으라고 했더니, 나아만 장군이 7번 씻고서 나았다.
이러한 사건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라”고 말씀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문둥병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며, 엘리사가 방법을 제안했더니, 그 방법대로 따르니 해결된 것이다. 예수님도 당시 베드로에게 손짓을 통해 “저기 깊은 곳”으로 방향을 알려주셨을 것이다. 마치, 엘리사가 “요단강물”로 지칭하듯, 방향과 위치를 알려주셨고, 그곳이 깊은 곳에 해당한다.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가 잡혔다.
누가복음 18장 35절에 여리고에 있는 거지 맹인 바디매오가 나온다. 그 사건의 근본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실 때, 맹인이 치른 값이 무엇인지, 사람들은 진실로 알아야한다. 맹인이 치른 값은 사도 바울과 비슷했고, 베드로와 동일했다. 베드로는 그물을 버렸고, 사도 바울은 국회의원 직분을 버렸다. 맹인은 무엇을 버렸을까?
예수님 :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바디매오 :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이 맹인 거지 바디매오에게 “무엇을 해주길 원하느냐”고 진실로 물었던 것은 ‘직업의 포기’를 전제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맹인들에게 ‘안마사의 자격’을 허락한다. 맹인은 사회적 빈곤층으로서 국가의 다양한 혜택을 받는다. 장애인 수당과 같다. “맹인으로서 특혜를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냐”고 예수님이 묻는 것이다. 바디매오는 맹인으로서 받는 혜택을 버리고, ‘보는 것’을 택했다. 이것이 바디매오의 출애굽이다. 성경을 읽을 때는 텍스트를 자세히 파악하고, 그 사건을 완벽히 이해한 다음에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머뭇했다. 바알이 주는 특혜와 하나님을 믿는 불편함 사이에서 머뭇머뭇한 것이다. 바디매오가 맹인으로 살면서 각종 특혜가 좋다면 맹인으로 평생 사는 것이다. 반면, 맹인의 특혜를 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살길 간절히 원하면 ‘눈이 떠지듯’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그 세계가 바로 하나님을 믿는 참된 신앙의 자유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모든 성도의 억압을 풀어주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면서, 과부에게는 참된 남편이 되어주시고, 손실당한 피해자에게는 참된 은혜가 되어주시고, 상실한 마음을 가진 자에게 하늘의 선물이 되어주시고, 묶인 자에게 열쇠가 되어주신다. 예수님은 실제로 창조주의 능력을 가지셨고, 지금도 믿는 자에게 그 능력을 행하신다. 예수님이 ‘영원한 구원의 열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