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개론에서 요셉의 꿈을 근거로 마태복음 24장 말세비유를 해석한다. 해달별의 꿈을 부모와 형제들로 해석하듯, 권력의 해달별, 종교의 해달별로 풀이한다. 매우 그럴듯하다. 30개론은 ‘구약의 해가 떨어지고, 신약의 해가 떠오르듯, 신약의 해가 떨어지고 성약의 해가 떠오른다’라고 풀이한다. 과연, 창세기 해달별 꿈과 해몽이 그러한가? (모든 이단의 풀이법은 같고, 정답은 교주 이름으로 설정된다. 신약의 해=예수님, 성약의 해=교주 이름)
꿈은 요셉이 꿨고, 해몽은 하나님이 하셨다. 요셉의 꿈은 삶으로 해석되었다. 요셉이 꾼 꿈이 삶으로 어떻게 풀어졌는가? 어리석은 자들은 창세기 37장과 창세기 42장만 비교한다. 풀이과정은 생략하고, “이것은 이것이다”라고만 생각한다. 단세포적 해몽이다. 인간의 해몽과 하나님의 해몽은 전혀 다르다. 바로의 꿈을 놓고, 하나님의 해몽은 전혀 달랐다. 풍년 7년, 흉년 7년으로 해석하고, 풍년으로 흉년을 대비하라고 정반대로 해석했다. 꿈에서는 흉년이 풍년을 삼켰으나, 해몽으로는 풍년이 흉년을 품었다.
바로가 꾼 꿈이 정반대로 해석된 것을 정녕 알아야한다. 바로의 꿈에 살찐 소 7마리가 나타났고, 마른 소 7마리가 나타나서, 마른 소 7마리가 잡아먹었다. 풍성한 일곱 이삭이 나타났고, 마른 일곱 이삭이 나타나서, 마른 이삭이 풍성한 이삭을 잡아먹었다. 꿈 내용이다. 이렇게 불길한 악몽이 없다. 끝이 비극이다. 비극을 희극으로 정반대 해석을 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보라. 해몽은 꿈의 정반대다.
요셉이 말하길, “이와같이 곡물을 이 땅에 저장하여 애굽 땅에 임할 일곱해 흉년에 대비하시면 땅이 이 흉년으로 말미암아 망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해석했다. 바로의 꿈은 ‘망하는 것’인데, 해석은 ‘흥하는 것’으로 결론났다. 꿈과 해몽은 정반대일 수 있다. 하나님이 해석자일 때 그렇다.
꿈은 삶으로 풀어진다. 밤에 꿈을 꾸듯, 깊은 밤에 속한 삶은 꿈이다. 밤길을 걷는 듯 감옥에 갇힌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꿈의 삶이다. 요셉이 높임을 받는 꿈을 꾸고, 요셉은 곧바로 추락했다. 아버지 심부름을 갔던 세겜땅에서 형제들의 음모에 빠져서 구덩에 갇혔다가 노예로 팔렸다. 보디발 장군집에서도 음탕한 아내의 음모에 빠져서 감옥에 갇혔다.
야곱의 집에서 요셉은 형들을 섬겼고, 아버지를 섬겼다. 보디발 장군 집에서도 요셉은 장군과 그 사모를 섬겼고, 맡은 소명을 섬김의 자세로 행했다. 감옥에서도 요셉은 죄수들을 섬기고, 또 섬겼다. 꿈에서는 요셉이 11 볏단의 섬김을 받았고, 해달별의 절까지 받았는데, 현실은 추락의 연속이었다. 꿈이 삶으로 풀어질 때는 정반대일 수 있다. 미적분처럼 난해하게 풀어지니, 하나님이 꿈을 푸신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라서 하나님이 삶으로 풀어내신다.
이러한 풀이과정을 생략하고, 소년시절 요셉이 꾼 꿈과 총리가 되어서 형제들이 절한 장면을 비교해서, “이와같이 이러하다”고 해석하면, 얼마나 천박한가? 해몽은 하나님께 맡겨야한다. 하나님은 요셉의 꿈을 통해 ‘인자의 권력’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가 높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겉옷을 벗으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셧다. 마치 옷이 벗겨진 요셉처럼 예수님이 그렇게 행하셨다. 섬김의 권력은 요셉을 통해 사전 예고되었다.
요셉은 노예생활, 감옥생활을 통해서 정녕코 깨달았다. 섬김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시인했다. 하나님을 섬기듯, 어떤 환경에서도 낮아지는 자세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겸손이요, 진정한 권력이다.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는 꿈을 어려서 꾼 것이라면, 그것이 성경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권력의 본질’을 말씀하신 것임을 알아야한다.
누군가 내게 옛날 교회로 돌아오라고 한다면, 나는 결단코 “그대가 나오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그곳에 있을 때, 영혼의 자유가 없었다. 그곳은 신부급 구원을 시킨다면서 노예처럼 살았다. ‘절대충성’의 다른 말은 ‘절대권력’이다. 절대권력은 노예적 신앙심을 낳게 된다. 죄가 사망을 낳듯, 절대권력은 노예를 생산한다. 신부가 되기 위한 노예적 신앙생활은 이집트의 고역생활과 흡사했다. 그곳을 떠나니, 나는 성경과 성령으로 살아간다. 이것이 진실한 행복이다. 그곳을 떠나면 멸망같지만, 하나님의 해몽은 정반대다. 십자가 복음은 멸망을 생명으로 변화시킨다. 아멘!!
예수님은 내게 말씀하신다. “너는 빛과 소금이다”라고.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지 않고, 이미 “빛과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매국노 삭개오에게 “너는 구원을 받았다”라고 하시면서, 매국노의 집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이시다. 모든 구원은 현재 지금 일어나는 것이다. 성경이 실체로 이뤄지는 것이다. 종교는 각 개인의 영적 구원문제, 삶적 생활문제를 각자 해결할 수 있도록 성경적 진리를 올바르게 전해줘야한다. 그래야 성도는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