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보니게 여자 사건은 마가복음 7장과 마태복음 15장에 나온다. 두 기록을 보완해서 읽어야 수로보니게 여자 사건의 진실이 드러난다. 대충 읽으면 예수님은 ‘민족주의자, 인종편견자, 여성차별주의자’로 오해할 수 있다. 전혀 아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수로보니게 여자에게 ‘구원의 떡’을 베풀었다.
베드로에게 베푼 은혜, 삭개오에게 베푼 은혜, 사마리아 여인에게 베푼 은혜, 베다니 마리아에게 베푼 은혜, 나사로에게 베푼 은혜, 백부장 종에게 베푼 은혜, 막달라 마리아에게 베푼 은혜, 세리 마태에게 베푼 은혜 등등 모든 은혜는 동일하다. 12년 혈루증 걸린 여자는 옷을 만졌더니 나았고, 구원까지 받았다.
누가 수로보니게 여자를 ‘개처럼’ 여겼을까?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눈 사건에서, 제자들과 사마리아 여인은 인종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제자들은 차별하는 쪽, 사마리아 여자는 차별받는 쪽이다. 예수님은 차별의 편견이 전혀 없었다. “물 좀 주세요”라고 자신을 낮췄다. 수로보니게 여자는 자신을 개의 입장으로 낮췄다. 그녀를 누가 개로 취급했을까?
제자들이다.
이 사건 바로 앞에, 제자들은 손을 씻지 않는 것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공개적 모욕을 당했다. 그때 예수님은 ‘부모 공경의 율법’을 거론하면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지 말라”고 제자들을 옹호했다. 유대교안에서 제자들은 ‘핍박받는 피해자’에 해당한다. 그런데, 피해자인 제자들이 이방인들을 편견으로 핍박한다. 예수님은 그것을 목도했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마태15:23)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마가 7:25)
여자가 소리를 지르면서 딸의 고통을 호소했다. 모성애다. 딸의 고통이 어머니의 고통으로 넘어왔다. 그녀는 애닯게 호소했다. 그때 예수님은 침묵했다. 침묵은 상황을 파악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여자와 제자를 모두 보았다. 이런 역설적 장면이 어디에 있을까? 바리새인들에게 무시받은 제자들의 장면이 이제는 제자들에게 무시받는 수로보니게 여자로 바뀌었다. 제자들이 곧 바리새인들처럼 ‘딸을 사랑하는 여자’를 문전박대한 것이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라고 했는데, 그 다음에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했다. 여자가 왔다. 이것은 제자들의 요청을 예수님이 거부한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제자들의 요구를 받아드리고, “너희들이 원하는대로 하라”고 했으면, 제자들이 그 여자를 몰아내고, 예수님은 집으로 들어가면 사건은 종결된다. 그런데, 여자가 왔다. 마가복음은 “그 발 아래 엎드리니”라고 했다. 이것은 예수님이 부른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문이요, 문을 여는 것은 예수님이 하셨다.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여자를 부르니, 발아래 엎드린 것이다.
결국, 상황을 종합하면, 딸을 고쳐달라고 호소하는 그 여자를 대변하고 변호하는 제자가 단 1명도 없었다. 제자들이 궁지에 몰렸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대변하고, 전면에 나서서 제자들을 지켰는데, 딸을 사랑하는 이 여자를 보호하는 제자는 없었다. 민족적 감정, 지나친 선민사상은 감성을 소멸한다. 예수님은 제자와 여자 모두를 보고서, 깊은 침묵에 빠졌다.
어찌 이런 일이!!
제자들이 개처럼 여자를 내쫓자고 한 것이다. 이방인을 격리하는 것은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방민족에 있는 예수님과 제자들도 쫓겨남을 당해야하는데, 제자들은 그것까지 생각하지 못한다. 이미, 이방민족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품었다. 그런데, 딸을 위해 눈물로 호소하는 어머니를 매몰차게 냉대하는 제자들의 몰인정은 ‘편견’이다. 수로보니게 여자 사건 바로 위에 거론한 ‘악한 생각들’에 해당한다. 마가와 마태는 그것을 은밀하게 폭로하고 있다.
[마태복음 15장]
18.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20.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마가복음 7장]
20.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수로보니게 여자의 사건에서 은밀히 감춰진 ‘인식의 귀신’이 있다. 바로 제자들의 편견이다. 여자는 사랑하는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길 간절히 원했고,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서 편견을 쫓아내길 간절히 원했고, 제자들은 사랑하는 예수님에게서 이방여자를 쫓아내길 간절히 원했다.
예수님은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고 선언하시면서, 3가지 문제가 동시에 해결됐다. 여자는 떠났고, 딸에게 귀신도 떠났고, 구원이 베풀어지는 그 순간 제자들의 편견이 떠났다. 신앙인에게 최대의 적은 이분법적 선민사상이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수로보니게 여자 사건을 통해서 알아야한다.
또한, 수로보니게 여자처럼 ‘개처럼’ 낮아지는 겸손의 자세를 가져야한다. 여기서 ‘개’는 애완견을 말한다. 수로보니게 여자는 잃어버린 딸을 찾기 위해서 ‘귀신을 몰아내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붙들었다. 그처럼 예수님도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생명을 구원하셨다. 이것이 진실한 모성애다.
끝으로, 마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한마리”를 말씀하셨지만, 곧바로 딸의 병을 아파하는 어머니를 불렀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제자들은 그 어머니를 외면하자고 제안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물리치고, 그 여자를 불러서 소원을 들어주시고, 제자들의 편견을 물리쳤다. 나는 과거에 ‘과잉충성’을 ‘절대믿음’으로 착각하여, 제자들처럼 ‘긍휼없는 냉담’을 행했음을 시인하고, 오늘 예수님께 용서를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