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는 생명력을 가져야한다. 비유가 살아있기 위해서는 시대마다 새롭게 해석될 때 그렇고, 다양한 창문을 선물할 때 그렇다. 이미 정해진 정답을 홍보하는 것으로 풀이될 때는 비유가 죽게 된다. ‘죽은 비유’는 힘이 없다. 우리가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드라마 시청률이 급상승하는 이유는 결말이 예측불가능해서 그렇다. 뻔한 스토리로 전개되면, 시청자는 흥미를 잃고, 채널을 돌린다.
비유도 동일하다. 성경속 비유를 접할 때, 우리는 기존의 정답을 버려야한다. 더불어, 골라먹는 편식도 버려야한다. 비유는 하나의 집과 같다. 주님은 비유의 앞치마를 입고서 당신의 집으로 초대하신다. 그곳으로 들어오라. 비유의 문을 열고, 들어가보라. 전혀 새로운 창문이 보일 것이다. 그것이 주님께서 알려주시는 감동의 선물이다.
모든 비유는 그렇게 봐야한다. 이미 해석된 틀로 비유를 죽이지 말라!! 비유는 주님이며, 주님은 오늘도 살아계신다. 비유는 그 속에 들어갈 때, 모든 사람에게 전혀 다르게 놀라운 사실들을 알려준다. 물론, 큰 주제는 비슷하게 연결되겠지만, 각자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을 대면할 수도 있다. 그동안 알았던 것들과 정반대의 진실이 비유의 창문에 펼쳐질 때, 그때는 변화가 시작된다. 혹은, 비유의 집을 허물고 싶을 수도 있다. 어떤 상황이든, 주님께서 개입하신 것이다. 비유는 생명력있다.
누가복음 10장에 등장하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인데, 누가의 기록은 매우 도발적이다. 율법교사가 시험 출제자이고, 예수님은 시험을 당하는 쪽인데,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서 정반대로 돌려놓는다. 율법교사는 ‘강도만난 자’에 해당하고,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에 해당되며, 율법교사는 자신이 ‘영생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 ‘비유의 여관’에 초대받았는데, 전혀 알지 못한채 치유를 받고 떠났다. 완전한 치료가 되었는지, 아닌지, 성경은 결론을 내지 않았고, 예수님은 “가서 이와같이 계속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율법교사가 ‘비유의 여관’을 깨달았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깊게 이해하고, 율법의 틀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참된 신앙인으로 거듭났을 것이다.
비유속으로 들어가자. 비유속 사건에서 사마리아인을 예수님으로 고정시키는 것은 무리가 많다. 현실에서는 전혀 다른 사건들이 터지기 때문이다. 그럴때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며, 무엇을 행해야하는가? ‘영생과 구원’은 모든 신앙인들이 추구하는 것인데,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영생의 비밀’을 알려주는 비유이며, ‘선한 사마리아인’을 사랑해야 구원이 있다고 했다. (예수님은 제사장과 레위인과 사마리인중에서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자에게 이웃이라고 정의했다. 외면한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웃이 아니다. 이것은 변경될 수 없는 본문 내용이다.)
배경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발생했다. 예루살렘은 성전을 말하고, 섭리인을 뜻하고, 자격을 가진 자들을 말한다. 여리고는 변두리이며, 예루살렘과 반대방향이다. 보다 세상적이며, 자격이 없는 곳이다.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고, 여리고에는 여관이 있다. 예루살렘이 교회라면, 여리고는 봉사단체 혹은 절이 될 수도 있다.
강도만난 자는 유대인이다. 왜냐면, 율법학자가 유대인이며, 민족주의자여서 그렇다. 예수님은 민족적 우월감을 가진 율법학자에게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단지, 스스로 깨닫도록 유대인인 것을 감췄다. (옷이 벗겨진 것은 민족과 신분이 모두 실종된 사람을 말한다.)
제사장이 ‘거의 죽게 된 강도만난 자’를 멀리서 보고 다른 쪽으로 피해서 지나갔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나쁜 제사장”이라고 욕할 수 있지만, 제사장은 율법을 따랐다. 율법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만약, 죽은 시체를 만지게 되면 그는 정결의식을 해야하고, 제사장 직분을 행하는데 상당히 번거러워진다. 누군지 신원도 알 수 없는데, 제사장이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다. 레위인은 제사장을 따라서 했는데, 제사장은 아주 멀리서 미리 피했고, 레위인은 죽게 된 것까지 확인했다. 제사장이 뭔가 불길해서, 레위인에게 넌지시 가서 알아보라고 했을 수도 있다. 어떤 상황이든, 레위인은 그 사람의 상태를 알고도 구제하지 않고 피해서 지나갔다. 외면했다.
제사장-레위인-성도의 순서로 직급이 내려가는데, 갑자기 ‘사마리아인’이 등장한다. 비유의 순서로 보자면, 제사장이 외면하고, 레위인이 외면했는데, 유대인 성도가 외면하지 않고 신원이 불확실한 누군가를 도와줬다라고 해야하는데, 갑자기 ‘사마리아인’이 튀어나왔다. 이런 비유는 돌연변이요, 선지자요, 망치다. 성경속에는 이런 경우가 매우 자주 등장한다. 그럴때마다 누가 진정 이웃인지, 실감 절감할 수 있다. 구제해준 자가 바로 이웃이다. 예수님이 “누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인가”라는 말씀도 이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강도가 강탈한 것은 매우 나쁘다. 가해자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강도들이니, 폭행집단이다. 그런데, 구제하지 않은 제사장은 더욱 나쁘다. 자신의 입장 때문에, 자신의 처지 때문에 상대를 돕지 않은 것이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전혀 달랐다. 죽음에 처한 누군가를 향해서 적진속으로 들어갔다. ‘적진’이라고 표현한 것은 여리고성이 유대인들에게 속해서 그렇다. 아리마대 요셉이 국회의원 신분을 내놓을 각오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한 것과 같다.
게다가 거의 죽게 된 유대인을 나귀에 태워서 여리고 여관에 데려간다면, 용의자에 오를 수도 있는데, 사마리아인은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고 구제활동을 했다. 그리고, 다음날에도 여관에 찾아가서 1주일에 해당하는 여관비 2데나리온을 지불하고, 혹시 부족하면 갚겠다고 약속까지 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거의 죽게된 사람을 여관에 데려가고, 여관비를 계산한 것 이상으로 자신의 신분과 목숨을 내놓고서 그를 구원한 것이다. 이 내용속에 감춰진 진실은 ‘사마리아인이 목숨을 걸고 유대인을 구출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말한다.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고.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하라는 것이다. 율법학자는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는데, 예수님은 “너가 누군가의 이웃이 되라”고 요청한다. 그 율법학자는 누군가의 이웃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했을까?
때론, 강도만난 자가 예수님이 될 수도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권력의 강도를 만나서 모든 것을 잃었다. 그렇다면 선한 사마리아인은 누구인가? 이방민족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를 사랑하였다. ‘이웃’의 핵심은 ‘긍휼과 자비’다. 하나님은 사람을 향해 긍휼과 자비를 갖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긍휼과 자비를 잃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이 오히려 긍휼과 자비로서 은혜를 베풀었고, 목숨을 걸고 누군가를 구원했다. 강도만난 자에게 사마리아인이 구원주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긍휼과 자비를 잃고 살면 안된다. 긍휼없는 목사는 무당보다 못하고, 자비없는 성직자는 스님보다 못하다. 긍휼과 자비를 가진 정치인이 때론 선지자로 이 시대를 계몽한다. 긍휼과 자비를 외면하는 종교 사명자들이 돌이켜야한다.
대한민국은 각종 강도들을 만났다. 누가 선한 사마리인이 되어 구제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