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비유는 그 누구라도 차용, 인용, 편집해도 된다. 저작권도 없고, 성명권도 없고, 그 누구도 정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성경을 인용해서, 자신을 변호하는데 활용하는 것은 성도의 도리가 아니다. 내가 새롭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배운 첫 번째 기본원칙이다. 예수님이 좋은 목회자를 통해 나를 인도하신다. 성경 텍스트에 깊게 뿌리를 두고, 상상하라!!
나는 글을 쓸 때, 3단계로 배웠다. 1) 현장으로 가라 2) 들어라 3) 상상하라. 3단계 과정은 내게 글쓰는 작가의 독특한 실력을 갖춰주었다. 14년 정도 기자와 작가의 길을 걸어왔고,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해주심을 고백한다. 아주 무섭고, 괴팍하고, 성격이 독선적이고, 평판이 나쁜 편집장이 있었다. 내가 첫 언론사 직장을 가졌을 때 만난 편집장인데, “기자생활 그만 두고, 과외를 할까”라고 고민할 정도로 힘든 장애물이었다. 그 편집장의 첫 번째 교육은 “기자는 현장이 사무실이야!! 놀아도 밖에서 놀아!!”였다. 나는 그 교육이 지금도 뿌리깊게 내려져 있다. 밖은 현장을 말한다. 현장에서 사람을 만나고, 사건을 접하고, 사람들의 배경을 관찰하고, A가 B를 욕하면, A와 B를 모두 만난다. 이것을 배웠다. 현장에 나가면, 가방은 항상 자료로 가득찼다. 그리고, 기사를 썼더니,
그 편집장은 내 기사를 내 얼굴에 던졌다. 아!! 그 충격!! 그 편집장이 “이게 기사야!!”라고 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아, 그게 기사가 아니구나…. 그럼 기사는 뭘까….” 그게 나의 궁금증이었다. 당시, 나는 34세, 적지 않은 나이였는데, 편집장은 50세가 넘었다. 편집장의 기분이 조금 나아져서, 내가 가서 물었다. “그럼, 기사는 어떻게 써요?”라고. 그때 편집장이 기사쓰는 법을 알려줬다. 그때 그교육이 내 평생 잊혀지지 않고, 기사의 철칙이 되었다. (나는 공대출신이어서, 글쓰기를 기자가 된 이후에 현장에서 체득했다.)
모든 배움은 쉽게 되지 않는다. 가장 큰 배움은 경험이며, 현장이며, 살과 뼈로 체득하는 인격의 삶이다. 지식은 휘발류와 같다. 금새 증발된다. 논증법은 다시 논증되면서 돌고 돈다. 인격은 향기가 있어서 사람들이 몰려든다. 인격의 향기는 예수님의 비유와 같다. 성경적 비유는 누구든 차용할 수 있고, 변조해서 활용할 수 있지만, 예수님의 관점에서 사용된 비유의 근본은 쉽게 바뀔 수 없다. 비유를 해석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비유를 사용한 예수님의 관점이다. 그것을 명확히 파악하고, 그 이후에 응용이다.
기사(記事)는 사실의 기록이다. 분명, 기록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사실의 기록이다. 주인공은 ‘사실’이다. 그래서 기자는 현장에 있어야하고, 현장에서 사실을 가져와야한다. 사실에 뿌리를 두고, 사실의 단어를 토대로 글을 쓰는 것이다. 만약, 문학적 창조를 해야한다면, 사실의 확장에 오차범위를 판단해야한다. 사실이 없을 때, 새로운 사실을 임의로 만들 수 없다. 그때 추가로 전문가 인터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객관적 관찰자로서 기자는 ‘있는 사실이 말하는 진실’을 보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의 비유는 ‘사건의 기록을 토대로’ 비유가 무엇을 말하는지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이 왜 그 비유를 말했는가?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누가복음 16장에 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나온다. 누가복음은 본래 15장과 16장이 연결된다. 교회가 읽기 좋게 챕터를 구분한 것이고, 사건의 전개와 편집은 15장과 16장이 연결된다. 작가의 의도를 알려면, 15장과 16장을 연결해서 파악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성경은 특히 그렇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는 어떤 집을 교회삼아 현장설교를 하셨다. 그것이 15장 16장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 ▲ 창녀에게 재산을 탕진한 둘째 ▲ 불의한 청지기 ▲ 부자와 거지 나사로 등등 5개의 비유 설교가 이어진다. 마지막 부자와 거지 나사로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직격탄을 날린 설교이다. 누가의 기록이 그렇다.
‘불의한 청지기’는 장자일까? 차자일까? 그 입장이 누구일까? 왜 이런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면, 비유는 배경을 통해 주어지는데, 배경을 삭제하고 비유의 핵심만 뽑아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그 문장만 빼서, 불의함을 정의로움으로 둔갑할 수도 있다. 불의함을 행해도, 그 소득으로 그리스도에게 유익이 있다면 ‘구원에 합당하다’는 궤변이 나온다. 과연 그러한가? 약탈한 재물로 교회를 지으면, 그것이 공의인가?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 ① 부자 ② 마을주민 ③ 고발자가 등장한다. 마을주민은 채무자이면서, 고발자이다.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고 했다. 누군가 청지기의 불법을 주인에게 고발한 것이다. 정보를 듣고, 주인은 청지기를 불러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고 말했다. 청지기는 어떤 변명도 없다.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는 말은 회계장부를 반납하라는 의미다. 불의한 청지기는 보디발 장군의 요셉처럼, 집안 살림을 모두 맡았던 것 같다. 이제, 청지기는 실업자다. 회계장부를 반납하려고 가면서, 꼼수를 생각했다. 고발자도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궁리하다가, 분식회계를 결심한다. 그런데, 불의한 청지기의 분식회계는 매우 독특하다. 채무자를 위한 분식회계다. 분식(粉飾)은 밀가루로 꾸민다는 뜻이며, 분식(粉食)은 밀가루 음식이다.
기름 100말을 50말로 고치고, 밀 100석을 80석으로 고쳤다. 이 사건과 관련해 예수님은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라고 했다. 우리는 이 대목을 매우 깊게 고찰해야한다. 우리의 상식과 다르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건의 진실을 파악하려면, ‘마을주민의 존재’를 인정해야한다. 어떤 부자와 불의한 청지기의 사건같지만, 실제 주인공은 마을주민이다. 왜냐면,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나쁜 평판이 부자에게 들어가면서 사건이 시작된 것이다. 직분을 가지고 행하는 것은 그 주인에게 올라간다. 청와대 신문고가 있듯이, 성도의 기도는 하늘로 올라간다. 그래서 하나님은 날마다 이 땅에 내려와서 각 개인의 소돔성을 돌아보신다.
이제, 해고통보를 받은 청지기가 장부를 반납하기 직전, 마을 주민들과 공모한 분식회계 사건을 돌아보자. 5천만원의 채무가 갑자기 2500만원으로 줄어들고, 1억원이 5천만원으로 줄어들고, 200만원이 100만원으로 줄어들고….. 동네에 ‘아름다운 복음’이 전파되었다. 이제, 마을주민은 불의한 청지기의 선행을 놓고, 누구를 칭찬하겠는가?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이름으로, 부자의 이름으로, 채무를 탕감했다. 장부가 고쳐졌으니, 그 사실을 알게 된 부자는 2가지 선택을 내려야한다.
만약, 부자가 ‘돈’을 추구하는 자였다면, “불의한 청지기가 끝까지 불의를 행했도다. 참형에 처하고, 공모한 마을 주민들을 즉각 고발하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자가 명예와 정의와 인심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로움을 극찬했을 것이다. 왜냐면, 마을 주민들이 그 부자에게 ‘올해의 가장 아름다운 인물상’을 수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을은 불의한 청지기 덕분에 부자를 ‘덕망높은 지도자’로 인정하게 되었다.
마을주민의 반응이 이 비유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이 비유를 읽으면서 “부자, 소유의 낭비, 셈하라”는 것에 무게중심을 놓으면서, 부자가 불의한 청지기의 직분을 뺏은 결정적 이유를 간과한 것이다. 부자가 청지기 직분을 뺏은 결정적 이유는 ‘나쁜 평판’이 들려왔고, 그로 인해서 부자의 평판이 나쁘게 인식되어서 그렇다. 불의한 청지기는 그것까지 파악하지 못했고, 단지, 자신의 퇴직 이후를 내다보면서, 자신을 위해서 회계장부를 조작한 것인데, 불의한 그 사건이 주인에게 유익을 준 것이다. 마을 전체에 부자를 칭송하는 소리가 높아졌으니, 부자도 그 청지기를 칭찬한 것이다.
돈이냐, 명예냐, 이러한 질문은 경제냐, 정치냐는 질문과 동일하며, 두 마리 토끼를 사람들이 잡길 원하지만, 토끼는 1마리만 잡아야한다. 해당 비유를 말씀하시고, 예수님은 분명하게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여기서 재물은 ‘맘몬신“을 뜻한다. 그리고 곧바로 자색옷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말씀하셨다. 자색옷 부자는 ’나쁜 청지기의 탐욕‘을 가진 악덕 부자이다. 대문 밖 거지 나사로를 외면했으니, 마을 주민에게는 어찌 했겠는가!!
나는 날마다 기도한다. 내게 들려오는 소식들을 놓고 애닯게 기도한다. 나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실지, 외면할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내 삶이 여전히 계곡에 처했으니, 하나님은 자주 나의 기도를 외면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성도의 기도를 흠향하신다. 성도들의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는 마을주민의 신문고를 듣고서 불의한 청지기의 직분을 박탈했다가, 청지기가 회심하고서 마을주민들에게 ‘은밀하게’ 선행을 베풀었더니, 마을주민이 청지기도 칭찬하고, 부자의 덕망을 곧바로 칭송했다. 하루가 걸리지 않고 일어난 대반전의 역사다. 부자도 그러한데, 하나님은 오늘도 이 세상을 내려다보신다. 우리는 불의한 청지기인가? 지혜로운 청지기인가? 앞날을 내다보며 나눔을 아는 청지기인가?
** 부자-청지기-주민의 관계는 상호보완적 관계이며, 마을주민이 채무자이지만, 소작농으로 부자의 논을 관리하는 백성일 수도 있다. 부자-청지기-주민의 관계는 삼위일체로서 서로 협력하는 공동체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청지기가 마을주민에게 은혜를 베푸니, 마을주민은 부자를 칭송했고, 결국 부자가 청지기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청지기가 주민들에게 악행을 저지르니, 주민들은 청지기의 악행을 고발하면서 부자를 욕하고, 부자는 청지기의 직분을 박탈했다. 사람이 베푼 선행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 사람이 베푼 악행도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