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날마다 즐겨읽는 몇권의 책들이 있다. ▲성경책 ▲추천 신앙서적 ▲삶과 화법 ▲니클라스 루만으로의 초대 등등이다. 이 중에서 삶과 화법 책은 3년전 내게 많은 ‘인식의 창문들’을 선물했다. 그때 참 고단하고, 쓸쓸한 광야를 걸었는데, 그 어느날 누군가 이 책을 선물했다. 그리고, 나의 책이 되었다. 도서출판 박이정에서 출간한 도서다. 삶이 고단하면, 나는 성경과 삶과 화법 책과 ‘니클라스 루만으로 초대’를 들고 까페를 향한다. 오늘은 삶과 화법 책을 들고, 집을 까페처럼 살아간다.
해당 도서 p8~9에 따르면, 소통은 2가지로 구성된다. 언어적 소통과 비언어적 소통이다. 언어적 소통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비언어적 소통이다. 언어를 창조한 인간은 ‘언어속에 내용’을 담지만, 현실속에서 소통은 ‘내용’보다는 ‘포장’으로 이뤄질 때가 많다. 이것이 비언어적 행동의 중요성이다. 가령, “고맙습니다”라고 누군가 말을 하면, 그 말을 할 때 표정과 어투와 상황을 통해 ‘고맙습니다’의 진의를 파악하려고 한다. 진심을 담아서 하더라도, 상대방은 정반대로 이해할 수도 있다. 비언어적 메시지가 언어적 메시지를 결정한다.
“비언어적인 행동은 메시지 자체의 언어적인 내용을 보충, 강화해 주기도 하고, 약화하거나 모순되게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온전한 의미의 의사소통은 언어적 의사소통과 비언어적인 의사소통이 상보적인 역할을 할 때 가능하다” (삶과 화법 본문중에서 p9)
언어적 메시지와 비언어적 메시지가 불일치할 때, ‘신뢰와 인격’이 무너진다. 예수님은 언어적 메시지와 비언어적 메시지가 일치하신 분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것은 말씀을 인격으로 행하신 것이다. 가령, 예수님이 “인자는 섬기기 위해 왔다”고 하시면서, “내가 온 것이 이미 섬김이니, 너희는 마땅히 나를 섬기고, 나의 종이 되어라”고 하셨다면, 언어적 메시지와 비언어적 메시지가 불일치한다. 예수님은 “섬기기 위해 오셨다”고 하셨다. 인격적 삶으로 섬기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은 그 인격이 훌륭하시다. 모든 성도들의 담임목사는 본질적으로 예수님이다. 모든 보편적 교회는 하나이고, 종파가 달라도 분교회로 분리되며, 예수님의 목회를 위탁받아 성도를 보살피는 것이다. 인생이 고단할 때는 이것도, 저것도 멈추고, 원점에서 주님을 찾는 것이 정답이다. 오랫동안 경험으로 깨달은 인생철학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소통할 때 다양한 채널을 활용하신다. 이것을 ‘계시’라고 한다. 계시(啓示)는 열어서 보여주는 것이다. 알게 하심이다. 성경말씀을 읽음으로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고, 꿈을 통해서 어떤 사건을 알려주시고, 만물의 언어를 통해서도 그 뜻을 나타내신다. 때로는 사건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서 창조와 멸망을 진행하신다. 창조는 시작이고, 멸망은 끝이다. 멸망은 곧 시작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24장 예언이 멸망과 창조를 뜻한다.) 마가복음 13장은 말세징조다. 이러한 징조는 행위적 계시로서, ‘사회에 나타나는 현상’이 곧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음을 알려준다.
‘호산나 찬양하리로다’는 환호를 받고서 예루살렘 입성을 하신 후, 다음날 새벽에 예수님은 ‘잎사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신다. 그 나무는 열매가 없었다. 실제로 무화과 나무를 보셨는데, 열매가 없어서 그 나무를 저주하니, 다음날 말라버렸다. 이것은 만물로 보여지는 말씀의 계시다. 예루살렘 성전과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이 작은 무화과나무로 나타난 것이다. 계시는 말세징조처럼 엄청나게 클 수도 있고, 무화과나무처럼 사소한 사건으로 민족의 흥망성쇠를 보여줄 수도 있다. 믿고 깨닫는 책임은 사람에게 있다. 사람도 대화를 할 때, 각종 소품을 활용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이시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