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을 때는 본문을 꼼꼼히 살펴야한다. 본문의 배경을 자세히 관찰함으로 비유의 문속에 들어갈 수 있다. 예수님은 비유의 옷을 입고 게시고, 비유의 문으로 초대하신다. 복음서 곳곳에 비유가 많고, 구약성경에도 그러하며, 예수님은 말세를 예언하시면서, ‘노아의 시대’라고 지칭하면서, 노아의 실체 사건을 ‘비유’로 설명하신다. 비유를 통해 무엇을 말할 것인가?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서 정작 하시는 말씀이 있고, 읽는 독자는 그 사건을 통해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도 있다. 설교는 동일하지만, 감동은 각각이다.
비유의 집에는 다양한 음료가 있다. 어떤 사람은 아메리카노를 주문할 수도 있고, 카푸치노를 마실 수도 있고, 까페라떼를 마실 수도 있고, 레몬쥬스를 마실 수도 있다. 까페 주인이 즐기는 음료가 있어도 손님은 자신의 취향에 맞게 음료를 골라 마시는 것이다. 비유가 이와 같다. 단지, 예수님의 비유를 깊게 상고할 때는 비유의 배경을 허물면 안된다. 설정된 비유안에서 다양한 상상을 해야지만, 예수님이 설정한 ‘비유의 까페’이지, 비유의 원문이 변경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까페가 아닐 수 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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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유에는 6종류의 사람이 나온다.
1. 강도
2. 강도만난 자 (거의 죽은 자)
3. 제사장
4. 레위인
5. 사마리아인
6. 여리고 여관 주인
이 중에서 강도만 강도떼다. 집단으로 나그네를 붙잡아서 옷을 약탈하고, 가진 물건을 뺏은 산적들인 것 같다. 그런데, 강도만난 자의 출신이 불분명하다. 강도도 익명이고, 강도만난 자도 익명이다. 해당 비유의 특징이 그렇다. 제사장과 레위인과 사마리인과 여관 주인은 민족성이 드러나고, 직업도 대체적으로 드러난다. 강도는 뺏는 자, 거의 죽은 자는 뺏긴 자이다.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자”라고 표현된다. 왜 맞았는지, 왜 강도를 맞았는지, 이유도 설명도 없다. (옷을 벗기고 뺏었다는 내용도 없다.)
거의 죽은 자가 만약, 친일파와 같은 사두개파 앞잡이라고 하자. 또는 악명높은 범죄자라고 하자. 강도만난 자는 ‘사회적 약자’라고 정의할 수 없다. 그냥, 누군가, 강도를 만난 것이다. 보복에 의해 그렇게 될 수도 있고, 민족의 반역자를 처형한 것일 수도 있다. 친일파를 암살하던 독립군처럼 그렇게 당한 인물일 수도 있다. 강도만난 자에 ‘이완용’과 같은 친일파가 누워있다면, 우리는 대부분 3과 4의 입장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매우 불편한 진실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외면함으로 강도의 살인에 간접적으로 공모, 동조했다고 해석하면, 위험한 상상일까? 레위인은 구제를 외면했으니, 그 책임이 없지 않다. 제사장도 부자가 거지 나사로를 외면하듯이 알고서 외면했다면 그 책임이 면제되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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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만난 자에 ‘유대인 성도’를 대입했을 때는 불편한 마음이 다소 완화되었으나, 그래도 사마리아인처럼 ‘거의 죽은 자’를 보살피고, 긍휼과 자비로서 여리고 여관까지 데려가서 구제활동을 해줄 수 있는 마음이 내게 있을까? ‘친일파’를 구제하는 것이라면, 사마리아인은 쉽지 않은 결단이다. 특히, 용의자로 몰릴 수도 있으며, 유대인들의 암살을 당할 수도 있으니, 사마리아인은 목숨을 걸고 행한 일이다. ‘거의 죽은 자’를 구제하는 것은 ‘죽음을 내걸고’ 행해야 가능한 일이다. 제사장과 레위인도 자신의 직업과 직접 상관있는 일이라서, 손실이 발생하므로, 외면한 것이다. 잠시의 외면이 구원의 상실로 이어진 것이다. ‘거의 죽은 자’를 살리러 가는 길이 곧 ‘생명의 길’이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핵심이 그것이다.
사망의 길과 생명의 길이 있는데, ‘생명을 살리는 길’이 바로 ‘구원의 길’이며, ‘생명의 길’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암시하며, 인류앞에 선한 사마리아인으로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이라고 믿는다. 아멘!! 믿는 성도는 예수님처럼 ‘거의 죽은 자’를 외면하면 안된다. 하루를 살면, 우리는 6명의 종류 가운데 1명에 속해서 살고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신이 베푼 긍휼과 자비를 내색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특별한 구원의 자비를 베푸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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