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장 16절에 예수님이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을 전도한 장면이 나온다. 안드레와 요한은 세례요한의 제자인데, 세례요한이 잡힌 후에 집으로 낙향해서, 생업에 종사했던 것 같다. 그때 예수님이 그들을 다시 찾아가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의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가 인생의 새로운 여정이며, 새 출발이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을 향했다. 그물을 버리고 따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어부에게 그물은 생존권이며, 생업이며, 직장이다. 모든 것을 그만두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의미인데,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살아간다고 해석함이 합당하다.
누가복음 16장 13절에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뜻이다. 권력, 직장, 가족, 명예, 땅, 돈 등등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우상이 되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자색옷을 입는 부자는 ‘경제적 성공’을 하나님의 축복의 척도로 삼았다. 자신은 성공했으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맘몬신을 우상처럼 섬긴 것이다. 돈을 우상으로 섬기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돈’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해서 그렇다. 돈은 돈일 뿐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돈을 있게도 하고, 없게도 하신다. 하나님은 풍년도 주시고, 흉년도 주신다. 물질이 많든, 적든,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3년의 사역속에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그 사건을 매우 의미있게 생각하시고, 그때 얻은 안드레와 요한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셨다.(요1:35) 안드레를 통해 베드로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요한을 통해 야고보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예수님은 사람의 보물, 사람의 연합으로 이뤄진 공동체를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셨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뤄지는 신앙 공동체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물을 버림’에서 시작한다. 그물을 버리는 것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것이고, ‘이삭을 번제로’ 바친 것과 같다. 인생은 반드시 하나님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삼아야하고, 그 다음은 ‘사람’이다. 누가복음 10장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거의 죽은 자’의 신분과 사연이 무엇인지 상관없이,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었다. 사람을 향한 긍휼과 자비가 사라지면, 감정이 메말라지고, 비판과 불만의 독초가 올라온다. 긍휼과 자비는 곧 감사의 자매다. 사람을 향해 긍휼을 갖고, 하나님을 향해 감사를 가져야한다.
마가복음 1장 35절에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른 복음서에는 없고, 마가복음에만 기록된 문장이다. 마가의 삶이 예수님처럼 새벽기도를 좋아했으리라. 빛이 밝아오면 세상이 드러난다. 세상이 모습을 보이기전에, ‘여명’은 하나님의 임재다. 새벽에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빈 광야처럼 공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