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실감각이 탁월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성전청소를 어떤 심정으로 하셨을까? 3년 사역에서 성전대청소를 하시며, 백성들에게 새로운 복음을 외치셨다. 지금은 민주주의 시대여서 집회신고를 하고, 공공기관 대여를 해서 정식 예배를 드리겠지만, 그 시대에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서 야외집회를 통한 성경강론을 행하신 예수님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 정신이 나를 새롭게 한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와, 냉장고를 성전청소했다. 몇 년동안 냉장고에 보관된 음식도 있다. 겉으로 보기엔, 안전한 냉장고같아도, 냉장고속에 담겨있는 모든 통들을 열어보니, 버려야할 것들로 가득찼다. 계란 4~5개와 고향에서 보내온 김치를 남기고, 모두 버렸다. 버리니, 내 마음도 시원해진다. “언젠가 먹겠지”라는 마음이 냉장고를 태만하게 하고, “언젠가 읽겠지”라는 마음이 내 사상을 책들로 어지럽게 만든다. 결국, 성경앞에 인생은 펼쳐진다.
오늘은 마가복음 3장을 읽었다. 마가복음 2장 끝에 안식일날 벼이삭을 잘라먹은 사건이 나오는데, 마가복음 3장과 연결된다. 두 사건은 같은 맥락이다. ▲안식일 밀밭 사건 ▲안식일 환자 치료 ▲귀신 축출 ▲12사도 임명 ▲분쟁하는 나라 ▲신앙가족에 대해 나온다.
예수님은 매우 현실적이다. 현실감각이 탁월하신 분이다. 모든 사건마다 ‘반응’은 즉각적이다. 가령, 안식일 밀밭 사건에서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제자들이 왜 밀을 먹느냐”고 하니, 그 사건으로 “다윗의 진설병”을 말씀하시면서, 바리새인과 제자들에게 성경적 진실을 교육하셨다. 밀밭과 다윗의 진설병이 절묘하게 연결된다.
이후,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손마른 환자를 고치는지, 안고치는지, 유심히 쳐다봤다. 예수님은 그런 바리새인을 유심히 쳐다봤다. 손이 마른 환자와 마음이 마른 환자들이 예수님앞에 있었다. 손이 마른 환자는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으나, 마음이 마른 바리새인은 자신의 내면을 못 보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한탄하사 노하심으로”라고 표현되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신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거의 죽은 자’를 여리고 여관까지 데려갔다. 반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외면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누가 진정 제사장일까? 사마리아인이 하나님이 보실 때 참된 제사장이고, 레위인이다.
예수님의 가족들이 갑자기 찾아왔다. 이때도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큰 울림을 주셨다. 상황을 보면, 가족들이 불안해서 찾아온 것이다. “예수님이 귀신에 들렸다”는 소문이 퍼져서, 가족들이 온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가족들’을 도표로 삼고, 배경의 시청각 자료로 삼고, 2천년동안 시들지 않는 한편의 드라마를 연출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같다. (눅8:21) 훗날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유언을 받고, 어머니 마리아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될 수 있도록 신앙공동체로 함께 했다. 그 누구든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가족들이 없는 곳에서 이 말씀을 하셨다. 가족들을 배려하시는 인격도 들어있다. 위 구절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가족들은 가족이 아니다”라고 이분법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 가족의 개념을 신앙적으로 확장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혈연적 가족을 믿음과 신앙의 가족으로 확장하면, 그 속에 혈연적 가족들도 들어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