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5장에 그 유명한 열처녀 비유가 나온다. 보통 성도들은 미련한 다섯 처녀와 지혜로운 다섯 처녀의 등불 비유만 알고, 누가복음에 나오는 지혜로운 종의 등불 비유는 모른다. 두 비유는 같을까? 틀릴까? 두 비유는 ‘혼인잔치’의 장소가 결정적으로 다르다. 마태복음은 열처녀가 기다리는 장소가 혼인잔치 장소이고, 누가복음은 ‘혼인잔치’에서 집으로 돌아온 장면이다.
마태복음 25장은 확실히 급진적 종교단체에서 자주 활용한다. 강력한 행동을 촉구할 동기를 부여한다. “보라 신랑이다! 나가서 그를 맞으라”라고 하면, 모두 맞아야한다. ‘영접’에는 청춘의 향유옥합도 있을 것이고, 동방박사처럼 학식과 명예와 존경이 담긴 선물도 있을 것이고, 집문서와 땅문서도 있을 것이고, 믿음의 등불도 있을 것이다. 선물의 등불이 없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이미 미련한 다섯 처녀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신랑은 누구인가? 마태복음의 신랑은 누구인가? 누가복음 12장의 주인은 누구인가? 비유를 해석할 때는 설정이 정확해야한다. 설정이 달라지면 뜻도 달라진다. 가령, 신랑을 ‘꿈’으로 풀면, 처녀들은 여학생이 된다. 등불은 학문과 동아리 활동과 생기부가 된다. 해석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렇다면, 이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은 ‘신랑’을 누구로 보았을까? 세례요한은 “나는 신랑의 친구요, 신랑을 맞을 신부는 복있다”고 말했다. 그처럼, 예수님도 “신랑은 따로 있고, 나는 예언만 할 뿐이다”고 했을까? “내가 신랑이니, 나를 맞으라”고 했을까? 이 부분은 매우 깊게 상고해야한다. 신랑은 남편이요, 대통령이요, 아버지요, 국가요, 운명이다. 신랑과 신부는 이름이 바뀌면 운명도 바뀌고, 자식도 바뀐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어떻게 해석하실까?
마태복음 25장과 누가복음 12장을 비교해보면, 누가복음 12장에 ‘혼인잔치 내용’이 들어있다. 시작부분에는 ‘혼인잔치’에서 돌아온 주인으로 등장하지만, 집에 돌아와서 베푸는 잔치가 ‘새로운 혼인잔치’이다. 우리가 ‘신랑신부의 틀’을 벗어나면, 전혀 새로운 관점이 열린다.
[누가복음 12:37]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누가복음 12:35에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고 했다. 종들이 허리에 띠를 띠고서 주인을 맞이하는데, 주인이 도착했다. 그리고, 문을 열어주니, 이제 주인이 허리에 띠를 띠고서 종들을 주인으로 영접한다. 주인이 종이 되어서, 종들을 대접하는 새로운 혼인잔치다. 이렇게 아름다운 인자의 권력을 어디서 볼 수 있으랴. 바로 예수님의 세족식이다.
마태복음 25장은 분명 재림의 비유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만난 예수님은 초림인가? 재림인가? 바울이 만난 예수님과 베드로가 만난 예수님은 다를까? 얼마전, 프랑스 노트르담 대성당에 화재가 발생했다. 첨탑이 무너졌다. 그때 불속에 예수님의 영인체가 출현했다. 그 예수님은 초림인가? 재림인가? 또는 무엇인가?
결국, 우리는 초림과 재림의 사이에 살고 있고, 서울의 초림역을 출발해서 순천의 재림역에 도착할 때까지 인생은 살고 있는 것이다. 순천의 재림역은 우주의 마침표가 될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새롭게 행하실 창조의 대변화일 것이다. 그 마침표가 오기전까지 우리는 재림을 향하고 있다. 재림의 마지막 때가 오지 않았어도, 우리는 이미 재림을 맞는 문턱을 넘어선 것이다. 문턱은 ‘무덤’에서 살아나신 부활의 예수님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마지막 재림이 이뤄지기까지, 우리는 재림의 주관권에 있는 것이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마태복음 25장에서 “천국은 열처녀와 같다”고 했다. 천국은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아니고, 열 처녀와 같다고 했다. 이것이 천국이다. 천국은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를 모두 포함한다. 누구든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되고 싶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의 위치에 놓을 때가 많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하는가? 거절에 익숙하라. 신랑이 문을 열어주지 않고, 거부했다. 이제, 신부들은 어찌 할 것인가?
하루를 돌아보면서, 열처녀중에 맞이한 다섯 처녀인지, 못 맞은 다섯 처녀인지 자신을 점검해야한다. 점검해야, 무엇이 부족했는지 자신을 돌아보고, 그릇에 기름을 준비할 수 있다. 해당 비유는 “그릇에 기름을 준비하라”고 조언한다. 매우 중요한 팁이다.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구원의 비밀”을 묻자, 예수님은 “부족한 1%”를 알려줬다. 그 부자청년에게는 ‘그것이 그릇의 기름’이다. 답은 알았는데, 부자청년은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돌아가서 어찌 했을까? 성경은 답을 내리지 않았다. 삭개오처럼 회심했을 수도 있고, 창고를 더 짓다가 죽은 부자가 되거나, 거지 나사로를 외면한 부자로 늙어서 죽었을 수도 있다. 그 운명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다.
구원의 신랑은 예수님이다. 구원의 신랑 이름이 다를 수도 있다. 어떤 성도는 “부처”라고 하고, “마호멧”이라고 하고, “공자”라고 하고, “마르크스”라고 한다. 성경을 통해 약속한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얻는다. 누구와 결혼하느냐로 운명이 달라지듯, 구원주를 누구로 믿느냐로 영혼의 세계가 달라진다. 구원주의 신랑이름을 바꾸는 것은 신부된 성도의 자유이지만, 그 결과는 성도가 책임져야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신랑이다”라고 증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