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묘조장(拔苗助長)은 ‘묘를 뽑아서 성장을 돕다’는 뜻이다. 인재양성에 가장 나쁜 교육정책이다. 부모가 저지르기 쉬운 실책들인데, 비교하는 교육의 병폐를 비유한 말이다. 어떤 농부가 밭에 갔다. 이 농부는 귀농귀촌 출신인지, 혹은 퇴직자 농업인인지, 처음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았다. 벼가 쑥쑥 올라오는데, 옆의 논을 보니까 벼가 너무 작게 올라왔다. 그래서, 바지를 걷어부치고, 모든 모를 쑥쑥 뽑아서 옆의 논보다 더 크게 만들었다. 나와서 보니, 농부의 논에 있는 벼들이 훨씬 커졌다. 기분이 상쾌해졌다. 이튿날, 농부의 벼는 말라서 죽었다.
자식의 성장은 ‘누구의 아이’와 비교해서 키우면 안되고, 자식의 마음에 따라서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것이 돕는 것이다. ‘助’는 도울 조(助)인데, 벼가 부족한 것을 돕는 것이다. 미련한 농부는 옆의 논과 비교해서, 자신의 만족을 높이려고 벼를 희생한 것이다. 자식은 부모 만족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 자식은 자식의 귀한 인생을 살아야하며, 독립적 자유의지다.
마가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도 발묘조장의 인재양성 교육정책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 마가복음 6장에는 ▲고향 나사렛 교회 초청 강연회 ▲12사도 파송 ▲세례요한 순교 ▲오병이어 성찬식 ▲바다를 걷는 표적 등이 나온다.
예수님이 12사도를 파송하고, 헤롯왕이 “세례요한이 살아났다”라고 착각할 정도로 예수님의 복음이 이스라엘 사회를 휩쓸었다. 그리고, 남자 5천명이 예수님께 몰려들었다. 촛불혁명을 생각하면 된다. 촛불혁명은 부패정권 타도를 위해서 시민이 몰려든 것이고, 오병이어 사건에서 몰려든 백성은 ‘복음전파’를 통해 예수님께 나아온 것이다. 12사도가 파송된 결과로 이뤄진 사건이다.
오병이어 사건의 첫부분과 끝부분을 보면, 예수님은 혁명의 정반대 정책을 실시했다. 즉, ‘십자가 사건’의 방향으로 가진 것이지, ‘정권탈환’의 방향으로 가신 것이 아니다.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마가 6:30)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르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백명씩 또는 오십명씩 앉은지라 (마가 6:39)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마가6:45)
5천명의 남자가 모였으면, 헤롯정권은 위협을 받을 정도다. 엄청난 인파가 몰려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병이어 성찬식을 하시고,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무리와 결별하게 하고, 예수님도 홀로 산으로 가셨다. 요한복음의 오병이어 사건에서는 그들이 ‘왕으로 삼고자’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 헤롯의 누룩으로 지목된 권력의 유혹이 당시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단호히 거절함으로 제자들을 보호하고, 자신도 하나님께 나아갔다. 발묘조장(拔苗助長)의 유혹을 이긴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그들의 요구를 받아드리면, 최소 남자 5천명 조직의 신흥종교가 구성되고, 마호멧처럼 무력항쟁을 교리로 채택했다면 이스라엘 독립을 위한 ‘강력한 무장단체’가 출범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거절했다. 권력은 독주(毒酒)와 같아서, 사람들이 몰려들면, 제자들은 술에 취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백성을 나누었고, 자신도 홀로 산에 가셨다. 학생이 학급에서 1등을 해오면, 그것도 좋지만, 1등의 독주(毒酒)에 취한 학생의 둔감함도 조심해야한다. 1등은 숫자일 뿐이다. 1등을 한 학생에게는 반드시 ‘2등이 되는 법’을 알려줘야한다. 이것이 인생의 지혜다. 상담기법에서는 ‘YES와 NO’라고 표현한다. 인생은 항상 YES만 있지 않고, NO도 자주 등장한다. NO는 거절과 거부와 실패를 뜻한다. 이것을 받아드리는 법을 배우고, 때로는 상대에게 NO를 할 수 있는 방법도 터득해야한다. 무조건 YES가 좋은 것이 아니다. 맑은 날, 흐린 날, 슬픈 날, 기쁜 날이 모두 함께 인생을 만드는 것이다.
요셉이 사춘기때 2가지 꿈을 꿨다. 벼이삭과 해달별인데, 두 꿈이 모두 형제들과 부모가 자신에게 절하고 섬기는 꿈이다. 그 꿈을 꾸고서 요셉은 꿈에 취해서 제2의 야곱이 되어서 형제들을 더 철저히 감시했을 것이다. 그런데, 요셉은 형제들에게 붙잡혀서 노예로 팔렸다. 그리고, 요셉은 철저히 낮아져서, 섬기는 자가 되었다. 감옥에 죄수로 들어가서 그곳에서도 섬기는 자가 되었다. 17년간 섬김과 헌신과 노예와 죄수로 살고서, 요셉은 총리대신이 된 것이다. 그는 총리대신이 되었으나, 이미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신앙심이 갖춰진 것이다. 갖춰지지 않고서, 권력을 얻게 되면, 버닝썬 클럽 사태처럼 망조가 들게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권력에 취하지 못하도록, 제자들을 위해서 권력의 발묘조장이 없도록 목회를 하신 것이다. 이것이 인자의 권력이다.
인자의 권력은 짐승의 권력을 멀리할 수 있는 최고의 지혜인 것이다. 예수님 시대에 가장 성공한 정치인은 헤롯이다. 그가 말하길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고 할 정도로, 그의 권력을 막강했다. 그런데, 역사는 그를 ‘가장 악한 왕’으로 기억할 뿐이다. 권력에 취하면, 모두가 동일하다. 가부장(家父長)처럼 가족의 작은 권력도 독재의 독주를 마시는 것은 ‘소주’처럼 취할 수 있다. 우리가 마실 것은 ‘성령의 포도주’일 뿐이다. 성령의 포도주는 곧 인자의 권력과 사랑의 복음이다. 그 외에는 약탈과 쟁취와 억압의 권력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