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에는 ‘좋았더라’가 총 7번 등장한다. 2일째와 7일째를 제외하면, 모든 날 만드신 작품이 좋으셨다. 2일째는 하늘을 만드셨는데, 너무 힘드셨는지, ‘좋았다’는 표현은 없다. 마지막 7일째는 너무 너무 좋으셨는데, 말없이 안식하셨다. 극치의 환희에 빠지면, 침묵한다.
① 빛 – 좋았더라
② 땅과 바다 – 좋았더라
③ 식물 – 좋았더라
④ 해달별 – 좋았더라
⑤ 물고기와 새 – 좋았더라
⑥ 짐승과 가축 – 좋았더라
⑦ 사람 – 심히 좋았더라
사람을 만드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다. 사람에게는 동물과 가축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권한을 주셨고, 식물을 먹거리로 주셨다. 창세기 1장에 따르면, 본래 사람은 초식동물처럼, 채식주의자(Vegetarian)로 창조되었다.
창세기 2장에 최초로 ‘좋지 않다’는 부정어가 등장한다. ‘돕는 배필’의 문제였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담의 입장에서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돕는 배필을 주셨다. 인생가운데 부족한 것은 항상 하나님이 주신다. 부족한 것이 채워지면, 그것은 하나님이 계획적으로 주신 것이다.
아담이 이르되, “내 뼈중의 뼈요, 내 살중의 살이다”라고 했다.
또 아담이 이르되, “남자에게서 취하였으니 여자라 하리라”고 했다.
하나님이 심히 기뻐했던 모습처럼, 아담은 엄청나게 기뻐했다. 이렇게 실감적인 표현이 없다. 하나님은 아담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 기뻐하신다. 아담의 반응에 반응하시는 하나님이다. 창세기 1장은 창조의 기쁨이고, 창세기 2장은 사람의 반응에 관심을 갖고 기뻐하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도, 자연의 꽃을 보면서 기뻐한다. 자연의 변화를 보면서 기쁨을 누리듯, 하나님은 사람의 변화에서 기쁨을 누리셨다.
[창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연합’(聯合)이다. 동물과 사람의 관계는 지배와 종속이다. 식물과 사람의 관계는 섭취의 식량이다. 사람과 사람은 ‘식량과 지배’가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식량으로 삼으면, 식인종이다.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면, 그것은 짐승의 권력이다.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은 짐승을 향해 그렇게 하라고 하셨으니, 사람이 사람을 권력으로 억압하고 다스리고 통제한다면, 그것은 백성을 짐승과 가축으로 본다는 것이다. 왕권체제에서는 백성을 농업경제의 노예로 보았으나, 민주주의 제도는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며, 대표자인 대통령은 심부름꾼에 불과하다. 사람은 사람을 통제하고, 다스릴 수 없다. 상호 연합의 관계는 상호 존중과 상호 섬김의 관계로서, 인자의 권력을 뜻한다. 남자가 여자를 섬기고, 여자가 남자를 섬기는 상호섬김이 곧 연합(聯合)이다. 가부장적 제도는 ‘통제하는 왕권체제’에 속한다. 창세기 2장에 따르면, 아담과 하와의 권리는 1:1이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 역할을 할지라도 둘은 구분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아담의 배필을 허락하셨는데, 배필이 배신했다. 아담의 부족한 점을 미리 파악하시고, 좋지 않은 것을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 하나님의 그 행위가 ‘좋지 않은’ 결과가 되었다. 게다가, 아담이 ‘돕는 배필 때문에’ 타락했다고 하나님의 책임을 추궁했다. 타락하기 전에는 분명 아담과 하와는 연합의 관계인데, 타락하고 연합이 주종으로 변경된다.
[창3:16]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아담이 하와를 통제하고 다스리는 관계가 된 것이다. 그 어떤 제도가 통제하고, 억압하는 족쇄라면, 그것은 타락후의 인간관계임을 알아야한다. 본래,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연합의 관계로 만드셨고, 예수님이 이것을 회복하셨다. 그것이 인자의 권력이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섬기고, 낮아짐으로 서로를 높이는 ‘그리스도의 연합’이 가장 아름다운 공동체이다. 국가적 연합도 UN이 추구할 이상적인 목표인 것이다. UN에는 상임이사회가 있을 뿐, 절대권력이 없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은 심히 놀랍다. 그 사랑이 곧 ‘가죽옷’이다.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잎으로 자신을 가렸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나님은 말없이, ‘가죽옷의 선물’을 주셨다. 인생이 실수해도, 하나님은 ‘돕는 선물의 옷’을 항상 주신다. 이렇게 인자하신 하나님을 어찌 외면하리요!! 하나님은 뺏는 분이 아니고, 주시는 분이다. 가끔 깊은 밤이 터널처럼 지속될지라도, 그 또한 아침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