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성찬식이 있었다. 부활절을 맞이해서, 교회 성직자분들이 거룩한 옷으로 갈아입고, 성도들에게 거룩한 빵과 포도주를 나눠주며, 각 사람의 이름을 이름으로 불러주면서 축복기도를 해주시는 모습이 2천년전 성만찬식이 오늘에 이어짐을 보게 된다.
설교에서 “마리아를 향해 예수님이 ‘여자여’라고 부를 때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못 알아봤지만, ‘마리아야’라고 부르니, 마리아가 알아봤다. 그처럼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 성도의 마음속에서, 교회의 교우를 통해서, 친구를 통해서 이름을 부르신다. 낯선 자로 느껴지지만, 그 속에 주님이 계심을 발견하는 부활의 성도가 되길 바란다”고 말씀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요한복음은 사실적 기록이다. 그 문체가 매우 사실적이다. 이러한 기록을 일컬어, ‘사실확인의 저널리즘’이라고 한다. 기록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문학은 대부분 상상을 펼치면서 글을 쓴다면, 역사는 사실을 기초해서 기록한다. 요한복음 1장의 앞부분을 제외하면, 대부분 요한이 직접 목격한 현장에서 요한의 관점으로 기록하였다. ‘요한이 본 그 관점’이므로, 사실확인의 팩트다.
“시체가 살아났는가?”
요한은 ‘시체의 부활’에 대해, 독자에게 판단을 넘겼다. 단지, 요한이 본 것을 기록하고, 요한은 ‘예수의 부활’을 믿었다. ‘시체의 부활’보다 ‘육체의 부활’을 믿은 것이다. 부활하시고, 살아나신 그 몸이 육체처럼 이 땅에서 활동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며, 투명인간처럼 안보이거나, 보이거나, 공간을 초월하거나, 공간에 지배를 받거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예수의 부활은 육체적이다. “육체로 임하심”은 곧 부활사건도 동일하다. 이런 관점에서, 부활사건은 초림과 재림의 중간에 속하며,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초림이면서, 재림이다. 초림에서 시작하면 초림이 진행중이고, 재림으로 따지면 재림을 향하고 있다. 부활의 주님은 그대에게 어떻게 임하는가?
제보를 자주 받는다. 그때마다 나는 2가지를 묻는다. “서류가 있는가?” “당사자인가?” 2가지가 확인되지 않으면, 제보가 아무리 실감적이어도, 소설일 수 있다. 서류로 검증된 이야기인지, 당사자인지, 그것이 불분명하면 ‘사실확인’을 판단할 수가 없다. 요한복음은 ‘요한이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이야기’로 구성되므로, 사실확인의 기록들이다. 특히, 부활에 대한 기록은 현장에 있어야만 가능한 묘사가 많다.
1. 요한은 세족식과 성만찬에 함께 있었다.
–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요13:23)
2. 요한은 겟세마네 동산에 함께 있었다.
–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26:37)
3. 요한은 십자가 사건 현장에 있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요19:26)
4. 요한은 예수님이 묻힌 무덤에도 있었다.
–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요한은 무덤이 텅 빈 것을 확인했다.
–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무덤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니산월 16일 사건은 유심히 살펴봐야한다. 최초 목격자는 막달라 마리아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시체 도굴’로 생각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고, 돌이 굴에서 굴려졌고, 시체가 사라졌으니, 시체가 사라진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고 울분을 토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달음질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도 감당하기 힘든데, 이제는 예수님의 시체마저 지키지 못했으니, 이것은 난파된 배가 다시 부서진 것과 같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다.
무덤속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베드로와 요한이 본 것은 모두 동일하다.
1. 세마포
2. 수건
3. 사라진 시체
묘사된 것을 보면, 얼핏 잠에서 일어난 사람이 수건과 이불을 정리한 것처럼 보여진다. 수건은 베개와 같고, 세마포는 이불같다. 그러나, “수건이 쌌던 대로 있었다”는 표현이 의미심장하다. 머리를 싼 수건이 머리모양을 유지한채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시체가 사라졌다면, 붕대와 세마포도 함께 사라져야한다. 그런데, 붕대 수건과 세마포은 그대로 있으니, 대략난감이다. 한국식 무덤으로 비유하면, 관은 그대로 있는데, 무덤이 열렸고, 시체가 사라진 것이다. 무덤이 열린 것은 돌이 굴려진 것이고, 관이 그대로 있는 것은 ‘수건이 쌌던 대로 있는 것’이며, 시체가 사라진 것은 예수님이 보이지 않은 것이다. 시체를 도굴한다면, 관을 그대로 가져갔을 것인데, 관은 그대로 두고, 마술처럼 시체만 사라졌다.
베드로와 요한과 다르게, 막달라 마리아는 빈 무덤속에 더 오래 있다보니, 전혀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 두 천사를 본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수건과 세마포를 봤다면, 막달라 마리아는 두 천사를 봤다. 이렇게 사람마다 보는 깊이가 다를 수 있다. 같은 것을 봐도. 전혀 다르게 보고, 해석도 다르고, 발견의 깊이도 다르다. 베드로와 요한도 같은 무덤을 봤지만, 깊이와 방향을 달랐을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전한 복음은 2가지다. 처음에는 시체도굴을 외쳤고, 그 다음은 예수님의 부활이다.
[요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나는 가끔 밤하늘을 올려보면, 지구는 무덤속임을 발견한다. 대략 새벽 3시, 별들이 사라진 밤을 올려보면, 암흑의 무덤속이다. 인생은 모태의 암흑에서 출발해, 무덤의 안식까지 살아가며, 살아있는 기간도 알고보면 생명의 무덤속이다. 무덤속에서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다. 보이지 않아도, 그 분은 무덤속에 계시지 않는다. 무덤속에는 우리가 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을 소유할 수 없다. 소유권을 따진다면, 그 분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살리시고, 소유하실 것인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속하시고, 우리가 그분께 속하길 바라진다. 이것이 인자의 권력이며, 인자의 소유관계이다. 인자의 소유권은 ‘서로 사랑’의 연합이다.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해서, 자신의 무덤속에 놓았으나, 예수님을 소유하지 못하였다. 베드로도 시체가 어디로 간줄 알지 못하였다. 막달라 마리아도 “내가 가져가리이다”라고 울면서 동산지기로 나타난 예수님께 하소연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요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지려고 한다. 차지하려고 한다. 붙들려고 한다. 그 분은 붙들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예수님께 붙들림을 당해야한다. 주님이 우리를 가져가게 하셔야한다. 우리는 죄악의 무덤속에 있을 뿐이다. 베드로도 결국 예수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살면서, 십자가에 거꾸로 메달려 생을 마감했다. 예수님께 붙들린 삶을 살아낸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따랐고, 이삭도 아브라함의 뜻을 믿고 순종했다. 그처럼,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뜻과 다른 하나님의 뜻을 믿고 순종했다. 예수님의 능력을 부정하고, 죽은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처럼 ‘내가 가져가리라’고 잘못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는 비로소 예수님께 속한 자가 되어서, 제자들을 깨우는 복음의 사도로 거듭난다. 누구든, 예수님께 붙들려 살아야 그 삶이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