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五餠二魚)와 칠병이어(七餠二魚) 기적은 현대문명, 자본주의에서 멸종위기에 처한 복음의 사건이다. 잘못, 왜곡됨으로,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가치를 훼손함으로 ‘나눔과 남음’의 가치가 사라진 것이다. 2천년전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는 4천명, 5천명이 모였을 때에도, 도시락 1개로 넉넉히 나눔의 성찬식을 가졌고, 거룩한 식사를 통해 배부름으로 집에 귀가했다. 있는 자는 더 있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뺏긴다는 말씀도 있지만, 근본으로 돌아가면 오병이어(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이 넉넉히 나눠 먹었다.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드시는 창조의 능력이 곧 ‘나눔’이다. 나눔은 남음을 낳는다.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마가8:6)
“작은 생선 두어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사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시니”(마가8:7)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사람은 약 4천명이었더라”(마가8:8)
칠병이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마가복음 8장 6~7절은 칠병이어를 나눈 사건이며, 8장 8절은 배불리 먹고 일곱 광주리가 남은 사건이다. 나눔과 남음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복음서 기자는 그것을 과감히 생략했다. 생략은 곧 독자의 무한한 상상력과 방법론과 가능성을 제시한다. 어떤 성서학자는 “떼고 떼고 떼고”라고 해석하는데, 그것은 소설적 상상력일 뿐이다. “떼어”는 오직 1번밖에 없다. 그리고, 떡 7개를 나눴고, 물고기 2마리를 나눴다. 예수님이 먹지 않았다. 그것이 중요한 사실이다. 축사를 하시고, 배가 고프셨을 것인데, 예수님은 그것을 무리들에게 나눠주신 것이다.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4천명의 밭에 ‘칠병이어’의 겨자씨가 뿌려지자, 일곱 광주리의 결실이 이뤄졌다. 먹지 않고 ‘나눔’을 했더니, ‘거둠’을 이룬 것이다.
복음서의 가장 아름다운 문학이 여기에 숨겨있다. 칠병이어가 일곱광주리로 변화했는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가난함을 그림자처럼, 바위처럼, 운명처럼, 보듬고 살아야할 백성앞에 예수님은 ‘나눔의 미덕’을 성찬식으로 보여주셨다. 칠병이어는 떡 7조각과 물고기 2마리다. 그 물고기도 ‘작은 물고기 두어 마리’라 표현된다. 2마리가 조금 부족한 물고기다. 반올림해서 두 마리이지, 엄밀하게 말하면 2마리가 되지 못했던 것 같다. ‘한밭 도시락 반찬’이다. 점심밥 1개로 모두 어떻게 나눠먹을 수 있었을까? 과학적으로, 경제적으로, 계산적으로 불가능한 사건이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은 ‘나눔의 창조력’이다.
다양한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50명씩 구분된 80개 공동체 그룹마다 새로운 칠병이어가 모아졌을 수도 있고, 먹지 않고 배부름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언젠가, 야외소풍을 나갔더니, 어떤 분이 함께 먹자며 도시락 반찬을 꺼내놨다. 그렇게 10여명이 모였더니, 모두 배부르게 먹고 남았다. 어떤 사람은 가져온 반찬이 없었는데, 모두가 배불리 먹었다.
내가 다니는 교회는 매주 식사를 하는데, 성도들이 집에서 가져온 반찬들로 식탁이 차려진다. 칠병이어는 ‘계산’이 아니고, ‘나눔’이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마지막 떡을 자신에게 가져오라고 했으나, 예수님은 그런 도시락까지 나눔으로 베푸신다. 예수님의 나눔활동은 기독교의 근간이다.
칠병이어가 집 7채와 땅 7마지기로 확장될 수도 있다. 베다니 마리아와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서 향유옥합과 몰약 4kg을 헌물했다. 사도 바울을 추천한 바나바는 자신의 구리광산을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위해서 헌물했다. 나눔은 크든, 작든, 모든 순간에 아름다운 ‘신의 손’이다. 모든 나눔은 성령의 손길이다. 예루살렘 교회가 가뭄으로 가난해졌을 때, 사도 바울은 ‘연보의 오병이어’를 모아서 나눔을 몸소 실천했다. 또한, 복음서가 이미 ‘나눔의 말씀’으로 2천년동안 독자들이 배불리 먹고 남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