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학교때 학교 대표로 수학경시대회에 출전해 동강중학교를 빛낸 인물이다. 중학교 2학년때였다. 수학을 잘해서 명문고 순고에 진학했다. 그래서, 이과는 나의 진로가 되었고, 수학계산이 무척 좋았다. 내 인생문제가 수학처럼 풀리지 않아서, 고단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을 때, 이스라엘 독립이 미적분처럼 풀린 역사환산과정을 배우면서, 내 인생도 그렇게 풀리길 고대하며, 이해되지 않는 인생을 이해된 척 살았었다. 정답은 언제나 원점이더라!!
이제는 하나님께서 좌표축도 움직이시고, 대칭이동까지 하신다. 내가 차지한 좌표는 축이 이동되면서 존재의미가 확연히 달라졌다. 아주 혼동스러운 사건을 경험하면서, 인생은 계산처럼 해석되지 않음을 인정했다. 맞다. 가장 완벽한 계산식은 가상화폐 금융 전문가들의 머릿속에 있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은행도 하루에 2~3개는 만들 것 같다. 그렇게 100만원, 1천만원, 1억원을 투자하면, 물거품이 되더라!! 누군가의 손실은 누군가의 유익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완벽한 계산식을 이제 싫어한다. 계산식으로 내게 오는 사람에게 나는 ‘바로의 꿈 비유’를 가끔 설명해준다. 살찐 소 7마리와 마른 소 7마리가 바로의 꿈에 나타났다. 마른 소 7마리는 바로왕이 봤던 것인데, 다이어트한 소가 아니고, 삐쩍 말라서 흉측한 소들이다. 악몽이며, 저주이며, 재난이며, 불길한 징조다. 하나님은 풍년과 흉년을 모두 사역자로 삼으신다. 미적분을 풀 듯, 통계의 순열을 해석하듯, 인생이 술술술 풀리면 좋겠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변수 z를 처리할 수 없어서, 우리는 괴로워해야한다. 변수 z를 버린 자들이 유대인이다. 그들은 변수 z를 버렸더니, 건축자들이 버린 그 z돌이 모퉁이 머릿돌이 되었다. 야곱의 10형제는 죽기보다 미운 이복형제 요셉을 버렸는데, 그가 훗날 양식의 생존권을 쥔 주권자가 되었다. 인생은 해석되지 않는 일들의 연속이다.
내 인생이 술술술 풀렸다면, 나는 지금도 성경을 몰랐을 것이다. 내 집에는 성경이 4권 있는데, 1권은 영어성경, 1권은 한자성경, 1권은 한글성경, 1권은 작은성경이다. 4권의 성경이 항상 책꽂이에 꽂혀만 있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으시고, 갑자기 변수 z를 만나게 하시더니, 결국 성경을 만나게 하셨다. 이제 나는 책꽂이의 성경을 펼쳐서 날마다 묵상하고, 내 삶의 문제를 성경속에 넣고서 풀어간다. 풀리지 않는 난해한 방정식은 언젠가 하나님께서 풀어주시리라.
너무 고단한 인생을 살았던 것인가, 나는 중년의 언덕에서 저녁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침보다 나는 저녁이 더 좋다. 드라마가 방영될 설레임도 있지만, 꼭 그것보다 ‘저녁’이 좋다. 내 인생에 또 다른 밤이 찾아오더라도, 성경이 있고, 하나님이 계시고, 빛나는 별들이 있고, 저항하는 풀처럼 권력에 굽히지 않는 광야의 소리들이 있으니, 나는 자유하다.
나는 예수님이 좋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베다니 마리아의 향유옥합으로 위로를 받으시고, 성만찬이 있던 그날에 겉옷을 벗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간음을 하다 붙잡힌 창녀가 곤경에 처했을 때, 공개된 여론재판에서 판사의 권한을 부여받은 예수님은 연약한 죄인의 편에 동참하셨다. 그 창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묻지 않고, 살아보라고 기회를 허락하셨다. 제자들을 통해 초대한 5천명의 민중이 들판에 모였을 때도 경제적 여건이 없는 속에서도 보리떡 5개로 ‘거룩한 식탁예배’로서 열린예배를 감행하신 그의 긍휼과 자비는 내게도 흘러온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위대한 영웅이 출현해도, 결국 예수님의 카피일 뿐이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는 예수님을 위한 모형과 그림자이듯, 예수님 이후에 등장하는 모든 영웅과 선지자와 종교 지도자들은 좋든, 나쁘든 예수님을 조명하는 사역자들뿐이다. 모두 예수님께 속했다. 예수님보다 더 큰 능력과 표적을 행할지라도, 하나의 범주로 해석하면 예수님께 속해서 하는 일들이다. 모든 시간의 원점이 되신 예수님은 오늘도 모든 종교와 교회와 사람들을 감찰하며, 내려다보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