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비유설교를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속에 스민다. 누가복음 15장과 16장의 설교는 심쿵한다. 예수님은 설교의 탁월한 감각을 지니셨고, 생활단상을 적극 활용하셨고, 청중을 시청각 자료로 펼치면서 순간포착을 놓치지 않았다.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와서 식사까지 했다. 그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함께 동참했다.
누가복음 15장과 16장을 읽을 때, 예수님의 관점에서 설교를 듣는 청중은 누구일까? 우리는 간혹, 세리와 죄인이 성도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배제할 때가 많다. 그러나, 5편의 비유설교를 들어보면, 예수님의 설교는 세리와 죄인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까지 포함해서 말씀을 전하셨다. 아!! 관용과 긍휼과 자비와 용납과 사랑의 대명사, 예수 그리스도!!
누가복음 15장과 16장에는 ▲잃어버린 양한마리 ▲잃어버린 동전 ▲가출한 탕자의 회개 ▲나쁜 청지기의 분식회계 사건 ▲자색옷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가 나온다. 잃어버린 양한마리 비유에서 우리는 죄인과 세리를 ‘잃어버린 양한마리’로 인식하면서,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을 99마리 양으로 착각한다. 과연 그러할까? 99마리 양에 대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눅15:7)으로 정의된다.
예수님의 설교가 전해지는 그 순간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어떤 위치일까? 유대교 관점에서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분명 99마리에 해당할 수 있지만,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 입장에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잃어버린 양 1마리’에 해당한다. 그날 설교 현장에는 세리와 죄인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 구성된 ‘잃어버린 양 1마리’가 모였다.
언젠가 교회에서 목사님이 집나간 탕자 비유를 설명하면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을 떠난 탕자이고, 첫째 아들은 아버지 마음을 떠난 집안의 탕자이다”라고 설명했다. 설명을 듣고서, 비유를 읽어보니, 장자는 아버지와 의견이 엇갈렸다. 아버지는 두 아들 때문에 항상 근심이다. 교회를 떠난 성도와 교회에 다니는 성도 때문에 하나님은 오늘도 근심한다.
첫째 아들=불의한 청지기=자색옷 부자를 연결해서 비유를 상상해보면, 장자의 은밀한 죄가 은밀하게 드러난다. 특히, 나쁜 청지기의 분식회계 비유는 그 자체로만 보면, ‘도둑질’과 ‘분식회계’를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집떠난 탕자와 거지 나사로 사건을 연결해서 해석하면, ‘용서과 관용’의 분식회계임을 알 수 있다. 채무는 ‘죄’로 자주 비유된다. 그날 설교도 세리와 죄인이 모였다. 세리는 ‘돈의 채권자’이고, 죄인들은 어떤 죄를 지은 자들이다.
빚은 곧 죄와 같다. 우리가 살면서, 용서하지 못할 형제의 죄를 발견하고, 가인이 분노하듯 죄를 목도한다. 아벨의 제사를 열납한 그 사건의 진실은 나타나지 않았다. 정보가 너무 부족한 사건이다. 가인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동생을 죽였다. 장자가 탕자를 죽이거나, 학대해서 둘째가 다시 집을 떠난다면, 그래서 거지 나사로처럼 집안에 들어오지 못한다면, 얼마나 슬픈 비극인가?
용서와 관용은 불의한 청지기가 행한 ‘분식회계 사건’처럼 과감히 삭감하고, 기억에서 지우고, 판단을 보류하고, 채권자는 채무자처럼 살 일이다. 불의한 청지기는 회계장부를 반납해야할 상황에 직면하니, 그제서야 회계장부를 조작해서 분식회계를 만드는데, 마을 주민들에게 유리하게 숫자를 고쳤다. 인생, 결국 반납해야할 회계장부다. 죽기전에, 받을 것 받지 말고, 용서와 관용으로 살아가자!! 내 인생을 향해 죄와 빚과 채무를 기록한 회계장부를 조작해서, 탕감시킨 예수님의 이신칭의(以信稱義)는 유대인들이 보기에, 불의한 청지기로 보일지라도, 나는 그런 예수님이 좋다. 내 삶의 집에 예수님을 영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