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값이 800원에서 1000원으로 올랐다. 매일경제와 한국경제가 지난달 오르더니, 조선일보와 일간신문도 덩달아 올랐다. 200원은 작은 액수지만, 25% 인상률이다. 상당히 높은 인상률이다. 신문의 인플레이션이다. 오르지 않는 것은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스타벅스 병커피밖에 없는 것인가? 몇 년째 2900원 출시된 가격 그대로이다. 스타벅스가 좋다.
친일파는 곧 매국노이다. 그런가? 한자로 따지면, 전혀 다르다. 친일파(親日派)는 일본과 친한 단체다. 매국노(賣國奴)는 국가를 판매한 노비다. 奴는 女와 又의 합성인데, 又는 오른손의 손가락 3개를 형상해서, 전쟁에서 붙잡힌 여자 노비를 의미한다. 한일합방 당시 분명 몇몇 친일파가 매국노가 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영원히 매국노인가? 이완용의 자손은 ‘매국노’인가?
조선일보 A34면 오피니언에 실린 ‘박정훈 칼럼’(어느 쪽이 친일이고 무엇이 나라 망치는 매국인가) 사설이 눈길을 끈다. 박정훈 논설실장은 소녀상과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현대판 척화비”로 비유했다. 의미심장한 해석이다. 우리는 비판의 걸음을 멈추고, 정의로 둔갑한 행동을 멈추고,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하는지 돌아볼 일이다. 짐승들의 권력투쟁은 국회에서 하는 일이고, 그 결과는 사법부가 판단할 일이다. 단지, 국민은 친일과 매국을 구분할 정도로 의식수준은 높아져야한다.
소녀상을 세우면서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좋지만, 그 사실을 ‘정의’로 내세우면서 일본을 반대하는 ‘배일사상’(排日思想)을 심어주는 것은 대단히 나쁜 이념교육이다. 배일사상을 심어주는 사람들은 ‘현대판 흥선대원군’일 수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박정훈 논설실장의 견해에 동의한다.
“세계인은 한국을 적폐청산이나 소득주도로 기억하지 않는다. 그들이 떠올리는 것은 삼성이며, 현대차 브랜드일 것이다. 정권 논리에 따르면 이 기업들은 전형적인 친일기업에 해당된다. 삼성전자는 산요의 기술로 시작했고, 현대차는 전범기업 미쓰비시에서 엔진을 들여왔다. 삼성 창업자 이병철은 일본을 스승처럼 모셨다. 그러나 일본은 극복할 대상이라는 관점을 한시도 놓지 않았다. 정주영도, 박태준, 구인회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일본을 알고(지일知日), 활용해서(용일用日) 이기겠다는(극일 克日) ‘전략적 친일(親日)’이었다.
– 오피니언 중에서 (박정훈 논설실장. 2019.4.26.금. A34면)
예수님은 친로마 사상이 짙었다. 자본가에 대해서도 관대했고, 산헤드린 의원들과도 가능하면 자주 대화를 나눴다. 매국노로 지탄받는 삭개오를 전도할 때는 그 마을 주민들이 보는 목전에서, 삭개오 집에 들어섰고, 창녀에게도 살아보라고 권면했다.
친일파라고 떠드는 자들마다, 우리가 사용하는 생활단어 80%가 일본인이 만든 언어임을 아는지 모르겠다. 일본을 진실로 거부하려면, 침묵하거나, 중국어로 말해야한다. 한국어는 단어가 일본이 만든 한자어로 구성된다. 알고 보면, 우리 선조가 일본에 천자문도 전해주고, 그 덕분에 우리도 일본이 만든 두단어의 조합을 사용할 수 있으니, 감사할 일이다. (정치, 이념, 사상, 세계, 생활, 현대 등의 단어는 일본이 만든 단어임. 생활단어 80%가 일본이 만듦.)
솔직히 나도 일본이 싫다. 왜 싫은가? 그 이유를 따지고 보니, 누군가 내 인식관에 ‘일본을 싫어하는 투명색 안경’을 씌웠다. 그것이 인식의 척화비다. 나는 그것을 제거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일본을 알지도 못하면서 싫어하는 내 자신을 오히려 반성하려고 애쓴다. 조선일보 칼럼, 1000원을 투자한 보람이 있었다.
나는 자주 성경을 깊게 읽는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나는 2개의 옷을 본다. 성경이 입고 있는 작가의 옷, 성경을 읽고 있는 독자의 옷이다. 두 옷은 모두 보이지 않는 인식의 투명옷이다. 나는 나의 옷을 벗기 위해, 자주 투쟁한다. 친일사상을 가지고서 몽유병 환자처럼 일본을 비판했던 지난 세월처럼, 인식은 무섭다. 스리랑카 부활절 자폭테러를 일으킨 주범 중에 2명은 재벌 2세라는 기사는 충격적이다. 극단적 우월주의는 분노를 조장하고, 생명경시 사상으로 숙청할 세력을 판단해서, 심판자가 되어서 정의의 도구가 된다. 무서운 종교이념이다.
공산주의 사상이 무섭듯, 누구든 자신이 가진 인식의 투명옷을 점검해야한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옳다고 믿었으나, 그 옳음이 틀림으로 바뀌었다. 성경을 깊게 고찰하면서, 자주 경험한다. 성령은 오늘도 나의 교사가 되어서, 하루의 수업을 진행하신다. 성경을 읽을 때는 반드시 독자가 입고 있는 인식의 옷을 벗고, ‘성경이 쓰여진 작가’의 옷을 입고서 봐야한다. 그 이후에, 독자의 인식으로 변환해야한다.
성경원문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독자 스스로 안다고 믿는 것으로 해석하면, 오류가 발생한다. 신문기사를 읽는 것도 난해한데, 2천년전에 기록된 성경을 읽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랴!! 나는 성경을 잘못 이해했던 지난 세월을 요즘 많이 회개하고, 성경으로 삶을 살아보려고 노력한다. 성경이 내 삶을 촉구하고, 인식의 표지판이 되어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