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주 읽는 책들이 몇권 있는데, 그 중에 니클라스 루만의 소통이론도 있다. 니클라스 루만은 저술활동이 매우 왕성했고, 이론의 변형에 매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면서, 내 지성에도 긍정적 영향을 줬다.
니클라스 루만으로의 초대(갈무리 출판사) p17에 따르면, “심리적 체계에서 그 요소는 생각이며, 사회적 체계에서 그 요소는 소통이다. 의식과정은 생각의 의미적 자기생산 과정이며, 사회적 과정은 소통의 의미적 자기생산 과정이다”라고 정의된다. 이 의미를 알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는데, 박철 교수의 도움이 컸다.
루만은 ‘생명의 정의’를 ‘자율적 운영’으로 봤다. 루만은 그 무엇이든, ‘스스로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시스템’을 ‘생명체’로 규정한다. 이런 측면에서 사람의 몸은 ‘생명체’이다. 사람은 먹는 것만 제공되면 세포들의 활동이 자율적으로 이뤄진다. 이때, 심리적 의식세계는 별도로 규정한다. 유기체는 유기체로서 ‘생명체’이고, 생각의 시스템은 전혀 새로운 영역이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무수한 생각의 파편이 발생하며, 카톡문자가 울리면서, 다른 생각의 파편이 떠오른다. 이러한 생각은 뇌세포의 움직임과 상관이 있지만, 뇌세포가 생각은 아니다.)
“뇌세포가 생각은 아니다”는 설명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많이 당혹스러웠다. 머릿속에 뇌가 있으니, 머리는 생각의 저장창고로 보통 생각하는데, 니클라스 루만은 확실히 달랐다. 뇌세포는 생각 자체는 아니다. 뇌세포가 움직이면서 생각이 펼쳐지지만, 뇌세포는 뇌세포이고, 생각은 생각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누구인가’의 질문은 매우 난해하다. ‘나는 누구인가’의 질문을 던지는 자는 누구이며, ‘나’는 또한 누구인가?
내가 니클라스 루만에게 끌린 이유는 내게 매우 유익을 주고, ‘소통의 본질’을 알려줘서 그렇다. 니클라스 루만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소통구조가 되면, 그 관계는 ‘살아있는 기능적 구조’가 된다고 정의한다. 쉽게 말해서, 어머니와 자식은 태어나면서, 엄청난 대화를 나누고, 다양한 의소소통을 한다. 하루에 수천번, 수만번, 상호작용의 소통을 한다. 나는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좋다. 어머니와 자주 대화를 나눴고, 다퉜고, 이해를 받았고, 괴로울 때 눈물로 안겼다. 아버지보다 어머니와 정감있는 대화를 많이 나눴다. 소통은 서로의 상호작용의 횟수와 깊이에 정비례한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결국 예수님과 만난 사연들의 모음집이다. 얼마나 깊게, 자주, 만났는가? 부활후에도 제자들은 예수님과 소통하려고 말씀을 묵상하고, 영적인 체험으로 예수님을 불렀다.
화법이론 책을 읽어보면, 우리는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상대의 말을 100% 이해했다고 믿지만, 10% 정도만 이해하고, 나머지 90%는 자신의 인식으로 받아드린다고 한다. 아!! 놀랍고, 충격적이고, 고마운 실험결과다. 난청(難聽)은 불가피한 심리현상이니, 자주 경청습관을 가져야겠다. (경청습관에는 역지사지와 반응과 되묻기가 가장 탁월하다. 하나님과 소통방법에는 기도, 찬양, 예배, 말씀묵상, 성도와 대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