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실의 아랫뜰을 살아가는 우리는….
나는 마가복음을 읽을 때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그 사건에 직면하면, 섬뜻할 정도로 작가의 편집의도에 마음이 서늘해진다. 사실을 날카롭게 드러내면서,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위대함과 그 진실함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피흘림의 언약이 2천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세상은 누군가의 허물을 드러내서 그 사람을 죽이려고 비판의 칼날을 세운다면, 마가는 베드로의 참회를 드러내기 위해서 ‘부인했던 사건’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였고, 베드로의 수제자로 불리는 마가의 기록은 베드로가 진실로 참회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마가가 참 좋다. 요한은 자신을 표현하길, “사랑하는 제자”(애제자)라고 표현했는데, 마가는 마가복음속에 자신을 지칭하길, “도망자”라고 표현했다. 그 표현법이 참 독특하다.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모두 도망하는데, 자신도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했다고 표현한다. 갑자기 등장하는 어떤 한 청년은 오직 마가복음에서만 등장한다. 예수님이 붙잡힌 그 현장에 마가도 있었음을 말하는 ‘사실확인의 팩트’로서 문학적 표현이 들어간 것 같다.
마가복음을 읽은 ‘마가 공동체’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자신들의 현실적 비루함에서도 깊은 위로와 평안을 얻었을 것이다. 게다가, 도망치는 제자들과 함께 도망친 마가의 행적은 “마가도 제자들의 반열에 속했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도망치는 제자들의 틈바구니에서 마가는 그래도 가장 늦게 도망치던 한 청년이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는데, 마가는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라고 했다. 변장을 하듯, 홑이불을 두르고서 따라갔던 것일까? 마가는 용기를 내서 잡힌 예수를 따라갔다. 잡히자, 그때 도망친 것이다.
닭이 2번 울기전에, 베드로가 3번 부인할 것이라고 예수님이 예언했고, 놀랍게도 베드로가 그 예언의 말씀을 성취했다. 아!! 이 역설앞에 베드로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예수님이 붙잡힌 후에는 복음의 내용을 외치는 자들이 달라진다. 예수님이 외쳤던 복음을 오히려 대제사장과 거짓 증인들이 외치고 있다. 반대로 역전된다. 마치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입맞춤을 하며 ‘랍비여!’라고 하듯이, 복음을 외치는 자들이 변경된다. 계시록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이 나오는데, 아합왕때 바알의 거짓 선지자들이 나오는데, 마가복음 14장에서는 거짓 증인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들도 ‘예수님의 복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반대한다. 창세기 3장에서도 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담의 아내를 유혹했다.
[마가복음 14:66]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14장 54절에는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로 표현된다. 베드로는 예수와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었고, 여종의 질문에 대답한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이 땅에 거주하는 모든 인생과 성도는 아랫뜰에 위치한다.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우리는 예수님과 멀어졌고, 아랫뜰의 시간으로 ‘현실의 뜰’에서 살아간다. ‘역사적 예수’라는 상징성은 우리가 ‘아랫뜰’에 있고, ‘멀리’ 존재함을 말해준다. 믿음과 신뢰가 강하여 예수님이 마음속에 살아 계셔도, 공간과 시간의 개념에서 믿는 성도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랫뜰”에 있을 뿐이다.
마가복음 14장 초반부 향유옥합 사건에서도 예수님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다. 항상 함께 있겠다는 말씀도 있지만,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는 말씀도 있다. 예수님은 분명 부활하셨지만, 살아나신 예수님은 제자들도 쉽게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영적 괄목상대’의 변화가 있었다. 항상 함께 있던 막달라 마리아도 쉽게 구분 못하고, 도마조차 손가락으로 못자국을, 손으로 창자국을 넣어서 확인해야 확인될 정도니, 현대인이 예수님을 알아본다는 것이 어찌 쉽겠는가?
예수님의 역사적 부활사건과 승천사건에서 지금 현재는 충분히 ‘아랫뜰’이며, 모닥불이 피워지는 삶의 현장이 펼쳐진다. 그때, 나는 우리는 얼마나 복음의 증인이 되어 살고 있는가? 나는 누구의 사람인가? 누구에게 속했는가? 월드컵이 펼쳐지면 ‘붉은 악마’를 열광하면서 좋아했던 이유는 ‘대한민국의 정체성’ 때문이다. 붉은 악마도 좋아하며 열광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열광하며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 삶의 현장에서 복음과 예수의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그것이 이 시대에 요구되는 진실한 믿음이 아닐까?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가 증인이 되어서 예수님을 변호했어야한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모르겠다. 마가복음을 읽어보면, 베드로가 있던 아랫뜰이 증인대였고, 대제사장의 여종이 검사로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때 베드로는 부인했다. 그리고 장소를 이동해서 2번째 증인출석이 이뤄지는데, 앞뜰이다.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누구의 사람인가? 누구의 도당(徒黨)인가? 닭이 2번 울기전에 부인했던 베드로처럼 깊은 밤이 찾아오면 인생은 예수님을 외면할 실수를 하게 된다. 그때마다 우리는 마가복음을 벗어나서, 요한복음 21장 디베랴 호수에 오신 예수님을 만나야한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변호사가 되어서 베드로에게 다시 질문한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