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장창훈 보도국장]=10년전, 경민대 김무현 교수가 나를 불렀다. 그는 한문의 조예가 매우 깊은 분이다. 그 대학의 어떤 곳은 예수님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그 앞에서 김무현 교수가 내 손을 살포시 잡더니, “이제 한문의 열쇠를 장국장에게 주니, 잘 부탁하네”라고 했다. 이후, 자주, 김무현 교수는 내게 한자를 알려줬는데, 공간과 시간은 넉넉하지 못했다. 이제 그때를 돌아보니, 예수님이 그 분을 통해 나를 불러 한자의 눈을 열게 해주셨다.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시듯, 그렇게 하셨음을 깨닫는다.
한자에 대한 책은 많이 썼다. 이제 다시 한자책을 쓰려고 한다. 기존은 한자를 한자로만 썼고, 이제는 한자를 통해 나의 사소한 일상의 삶과 신앙을 담으려고 한다. 한자는 과연 문자의 그릇 역할을 할만하다. 내가 아는 지식은 한계가 있으니, 한계로 완성될 그릇이 될 것이다. 부족함은 바닥이 될 것이며, 질문은 열린 입구가 될 것이며, 나의 작은 정보가 누군가의 창조적 상상력을 깨우는 촉매제가 된다면, 그것으로 족(足)하다.
내가 쓰는 한자해석은 내가 썼으나, 본래 배웠던 것이며, 핵심은 김무현 교수가 알려줬고, 대부분은 책을 참고했다. 책이 나의 스승이며, 근본을 거슬러 올라가면, 예수님의 손길이다. (한때 내가 30년간 속했던 교회의 목사님도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근본은 예수님이 그를 통해 내게 베풀어준 은혜였다.)
한자해석은 한자의 형태를 중심으로 해석해야한다. 山은 산의 모양을 본떴다. 仙은 人과 山의 결합이다. 두 글자가 결합했으면, 두 글자로 해석해야한다. 산에 사는 사람이 곧 신선이며, 산의 주인이 곧 신선이다. 모든 한자는 이렇게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한자의 뜻이 여러 가지인 것은 문화적 충돌현상으로 사람들이 만든 것이며, 파생된 의미이다. 근본적 결합을 파악하면, 한자의 뿌리를 쉽게 알 수 있다.
물은 ‘산소와 수소의 결합’이다. 한자는 AB로 되어있다. AB가 위아래로 결합된 것도 있고, 그릇속에 그릇이 들어있는 것도 있고, ABC로 된 것도 있다. 어떤 형태든, AB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며, 둘로 쪼개서 의미를 결합하면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한자는 뜻글자로 보통 알지만, 소리글자도 된다.
江은 氵工의 결합인데, [工]이 발음기호 역할을 한다. 양자강은 ‘쿵쿵쿵’ 소리를 내면서 울림이 컸다. 소리음값으로 工이 쓰인 것이다. AB에서 한쪽은 발음기호 역할을 담당한다. 모든 문자는 ‘읽기 위한’ 목적이 있다. 문자를 읽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한자는 발음기호가 글자속에 있음을 알아야한다. 仙을 ‘선’이라고 읽는 이유는 山(산)의 발음기호 때문이다. 仁을 ‘인’이라고 읽는 이유는 ‘人’의 발음기호 때문이다. 간혹 예외가 있을 뿐, 대부분 한자는 발음기호가 들어있다. 발음기호가 구분되면, 남는 글자가 무엇인지 드러난다.
家(집 가)는 ‘집’이 뜻이고, ‘가’는 음이다. 음(音)은 발음이다. 家는 ‘가’라고 읽고, 뜻은 ‘집’을 말한다. 무슨 집인가? 돼지집? 豕(돼지 시)가 들어있으니, 돼지집이다. 이것이 한자의 근본을 해석하는 것이다. 우리가 한자를 해석할 때, 자형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고, 그냥 대충 ‘집 가’라고 외우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家는 왜 ‘집 가’인가? 집에 왜 돼지가 있는가?
옛날에는 반지하 움집이었다. 그래서 돼지를 키우면서 뱀을 막았다. 돼지와 뱀은 천적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지나면서 돼지는 점점 개로 변경된다. 돼지는 뱀을 막았고, 개는 도둑을 막았다. 돼지는 가축으로 고기를 주는 동물로 바뀌고, 개가 집을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이런 측면에서 突이 집을 나타낼만하다. 이 글자는 갑자기 돌(突)이다. 굴 혈(穴)과 개 견(犬)이 합쳐졌는데, 옛날 아궁이속에서 잠을 자던 개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모양을 본떴다. 온돌을 놓을 때, 개자리 돌이 있는데, 그곳이 突과 상관있다.
집에 돼지가 있었다. 이러한 집은 평범한 백성의 집이다. 가축은 누구나 키웠다. 옛날 베들레헴에도 대부분 가축을 집에서 키웠다. 옛날 내가 살던 고향에 아버지는 작은 방에 ‘타조’를 키우셨다. 방이 3칸인데, 타조가 살던 방은 작은 방이다. 타조도 사람과 같은 지붕을 썼다. 20C 말의 농촌에서 흔한 풍경이다. 제주도 흑돼지는 사람과 함께 지금도 거주한다. 가축도 가족처럼 대하며 살았던 인심좋은 시절이다.
“예수님이 마굿간에서 태어나다니…..”라고 우리는 슬퍼한다. 이것은 우리가 인식하는 왜곡된 사실에서 발생하는 ‘악어의 눈물’이다. 물론, 그러한 사실이 예수님을 향한 애잔한 마음을 갖게 하겠지만, 예수님이 태어나신 마굿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르다. 말구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동물의 더러운 말구유가 아닐 수 있다. 생각해보라. 요셉은 왕족인데, 고향에 가서 푸대접을 받았을까? 나는 왕족이 아니지만, 명절에 고향에 가면, 고향 사람들이 대환영한다. 하물며, 요셉이랴!!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요셉이 고향을 방문했던 날은 인구조사 때문에 사람들이 붐볐다. 내가 설날 집에 가기 싫은 이유는 잘 곳이 없기 때문이다. 친척이 많다보니, 작은 아버지 가족이 건너방을 차지하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큰 방에서 주무시면, 나는 타조가 살던 방에서 잠을 자야한다. 물론, 타조는 바깥 창고에서 숨을 죽이며 살겠지만….. 타조 방은 사람이 살도록 청결해진다. 요셉이 잠시 머물렀던 마굿간은 안방과 연결된 방이었다. 家는 은나라 집의 구조이지만, 1C 유대인들도 농경문화에 정착하면서, 집에 가축을 키웠다.
“마굿간까지 내어준 어떤 친척의 베품과 자비와 은혜”에 대해, 우리는 “마굿간에서 잠을 재운 어떤 나쁜 여관주인”으로 착각한다. 그것은 독자의 맹점일 뿐,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마리아가 아이를 낳았는데, 과연 집주인이 안방을 내주지 않았을까? 베들레헴의 좋은 인심을 나쁘게 호도하면서 ‘예수님의 탄생’을 증거하는 것은 피해야한다. (중동인의 눈으로 본 예수, 1장 예수의 탄생 이야기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