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텍스트를 깊게 고찰할 때, 원문을 중심해야한다. 원문을 크게 벗어나면, 선로를 벗어난 열차처럼 뜻이 탈선한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악보를 바이블로 보고, 음표와 쉼표와 여백까지 분석하면서, ‘작곡가가 남긴 유언’처럼 곡을 재창조한다. 성경해석은 악보를 재창조하는 지휘자처럼 원문을 중심해서 재창조해야한다. 이와 관련해, 성경해석에 정관사 더(the)를 붙이는 것을 극히 조심하고, 부정관사 어(a)를 붙여서 독자의 자유를 허락하고, 해석자의 오차범위를 인정해야한다.
가령,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해달별의 추락을 특정인물로 제한해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며, 최초 기록자가 부여한 ‘자유의 숨결’을 죽이는 해석이다. 해달별이 추락하고 인자의 영광이 드러나므로, 해달별은 바로 인자의 영광을 가리는 모든 것들이다. 성경적 용어로는 ‘우상’이라고 하고, 미운물건이다. 각 개인에게 있는 우상들이 사라지면, 인자의 영광이 드러난다. 인자의 영광이 가리는 것은 모두 우상이다. (인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나니아 연대기에서는 사자 아슬란으로 비유되며, 얼음에 갇힌 하얀 마녀가 우상이다.)
특히, 예수님의 육체가 죽음으로 성전이 멸망당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오비이락(烏飛梨落)처럼 매우 위험스럽다.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의 관점이 배제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성전의 건물이 중요하지 않다. 성전의 기능이 중요한 것이다. 성전이 멸망당한 근본적인 이유는 기능상실에 있다. 성전이 기도와 죄사함의 기능을 해야하는데,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는 본래 기능을 상실하고, 드라마 녹두꽃에서 묘사하듯 동학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가렴주구를 일삼는 탐관오리(貪官汚吏)가 득실거리니, 성전은 멸망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떠났으니, 이미 멸망한 것과 같다.)
성경은 영원하다. 마가복음 15장과 16장에 따르면,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셨고, 살아나셨다. 최초의 목격자는 막달라 마리아이며, 십자가 사건에서 끝까지 곁을 지켰던 제자들은 대부분 여자 제자들이고, 사도 요한이 남자로서 유일하다. 초실절(初實節)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갔던 그룹은 모두 여자 제자들이다. 마가복음 16장 19절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우편에 앉아계시니, 예수님이 곧 성자 예수님인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과 예수님은 이 땅을 내려다보신다. 각 심령을 감찰하며, 복음의 말씀을 얼마나 신실하게 외치고, 증거하고, 살아가는지, 그 믿음과 행실을 감찰하신다.